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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제3자의 시선으로 봐라 보면 객관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한 사건을 두고 제3자의 입장이 객관적이라는 인식은 주변에서 흔히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친구 둘이 싸웠을 때 말리는 친구나 교사가 있습니다. 말리는 친구나 교사가 제3자의 입장이 되어 해결책을 내놓으면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말리는 친구나 교사의 입장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이죠. 그 원인을 생각해보면 싸우는 친구들은 싸움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감정이 앞서 잘못이 자신들에게 있다 하더라도 그걸 무시하고 자기 주장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반면 말리는 친구나 교사는 싸움의 당사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라는 인식이 있는거 같습니다.



 



  

   그래서 제3자의 관점이 객관적이라는 인식을 역사에 적용할 때 위험할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예가 필요하기 때문에 삼국통일전쟁, 그 중에서도 나당전쟁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당전쟁은 삼국통일전쟁의 후반부를 차지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전쟁을 끝으로 삼국통일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수 많은 연구자들이 나당전쟁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을 하여 다양한 관점을 봐라 볼 수 있는 연구성과가 축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삼국통일 전쟁의 기원은 언제부터고 언제 종결되었는지, 삼국통일이 아닌 백제 병합설인지 아닌지, 삼한일통의식이 당시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승리요인이 무엇인지,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할 것인지 부정할 것인지, 시대적으로 어떻게 평가가 바뀌었는지 등등입니다.

 

 

   이 글에선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집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나당전쟁에 대해 간략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당전쟁의 배경을 살펴보면 황산벌 전투전 소정방과 김유신의 대립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백제 원정과정에서 신라와 당 수뇌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의 의도와 다르게 당은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세워 장기점령할 태세를 갖추었고 웅진도독부 수장에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앉혔습니다. 신라는 이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당은 백제부흥군이 잔존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취리산에서 회맹을 열어 반강제적으로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인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감정이 골의 깊어지는 상황에 고구려가 멸망 그 후로도 양국간엔 백제에 대한 영유권 분쟁이 이어졌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은 노골적으로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으려 했고 이것이 나당전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죠. 여기서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활용했고 당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 당에 사죄를 하는 외교전략, 매소성과 기벌포 전투의 승리로 나당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에서 보듯 나당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신라가 당을 물리쳤기 때문이고 이는 역사 교과서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관점은 삼국사기의 관점을 계승하는 것이며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설화 된 거 같습니다. 문제는 일본이나 중국학계에서 회의적인 주장을 내면서 시작한 거 같습니다. 나당전쟁에서 당은 신라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토번이 침략해왔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한반도를 떠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한반도 방기론입니다.


  

   일본과 중국의 관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번은 지금의 티베트 고원에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지금의 티베트 인들의 조상인데요, 티베트인들과 다르게 숭무정신이 충만했고 대단히 강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당의 수도는 장안이었습니다. 현재 중국 수도인 북경에 비해 훨씬 서쪽에 있습니다. 그 만큼 장안은 토번에 가깝고 토번의 움직임은 당의 안보에 미치는 영향이 컸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 굳이 전선을 두 개 유지할 필요가 없었고 토번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 했다는 것이죠.

 

 

   저 역시 한 때 당이 물러난 것은 토번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교과서나 여타 역사교양서적에서 민족주의적 관점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토번의 역할을 무시하고 신라의 역할을 과도하게 평가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학계의 주장은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봤고 중국학계의 주장은 과도하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중 이상훈 선생님이 쓰신 나당전쟁연구란 책을 읽었습니다. 이상훈 선생님은 외국학계가 나당전쟁을 바라볼 때 전쟁의 배경이나 당과 토번, 고구려 유민 등에 초점을 맞추지 정작 신라를 전쟁 주체로 삼지 않는 다는 것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백제통합전쟁론이나 한반도 방기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며 이를 논증해 갑니다. 이를테면 백제통합론이 사실이라면 굳이 신라가 비열홀을 공격하거나 설오유를 보내 요동을 공격했겠느냐 하는 것을 시작으로 매소성 전투를 임진강 전역의 일부로 보고 중국이 부정하는 것과 다르게 신라가 큰 승리를 했고 그 후에야 당의 군사전략이 토번 방어로 바뀌었다는 점, 설인귀의 귀양 시기를 논증하여 기벌포 전투가 676년에 일어났다는게 맞다는 것 등을 적어두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에서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토번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지만 신라의 주체적인 역할도 상당했다고 말하는 것이죠.


  





   저는 여기서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론에서 예를 든 것처럼 친구 둘이 싸울 때 과연 말리는 친구나 교사가 이 둘의 싸움을 객관적으로 보는게 가능할 까라는 것입니다. 친구와의 갈등은 무수히 많고 각자 인생관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이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던 친구A가 전학을 왔는데 친구B는 친구A와 친해지려 장난쳤는데 친구A는 왕따 당한 기억으로 방어본능 때문에 친구B에게 적대적인 언행을 저지르고 갈등이 쌓여 싸움이 일어났다라고 하면 이런 것들을 주변 친구나 교사가 이런 내부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보다는 싸움으로 인해 수업분위기가 망가지거나 상처가 난 것에 대해 더 집중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박대제 선생님이 쓰신 의식과 전쟁이란 책에는 4세기 분기론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4세기 분기론이란 간단히 말하면 4세기에 삼국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체제에서 중앙집권국가(혹은 연맹왕국에서 귀족국가), 신라는 부체제의 시작으로(혹은 성읍국가에서 연맹왕국) 발전했다는 것이죠. 이를 증명하기 위해 1-3세기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내용을, 4세기 이후부터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끌어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무시됩니다. 박대제 선생님은 여기서 위서 동이전은 외부자의 시선이 담겼고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내부자의 시선이 담겼기 때문에 둘을 종합해서 봐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해선 연대를 적절하게 내리면 납득이 가는 주장이라고 봅니다.

이렇듯 외부자의 시선만으로 사건을 객관성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일본과 중국 학계 역시 민족주의 관점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근대사학은 일본에서 시작했지만 객관성 보다는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민족주의 관점이 강하게 투영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사학은 한국과 중국에도 영향을 줍니다. 당시 일본학계는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영향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간으로 봐라보는 것이 조선을 식민지배하려는 근거가 되었고 중국 입장에서 볼 때 신라의 영향력을 낮추고 당의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 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봤을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이 한반도 방기론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중국과 일본의 시각을 무조건 배제하자는 게 아닙니다. 사이비 역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국과 일본 역사학자들은 식민사학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당전쟁에서 토번의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고 영향을 끼친게 맞다고 봅니다. 다만 제3자의 시선이 객관적이고 옳다라는 관점에 대해서 조금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지 않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역사학의 본질이 객관성을 담보로 한 주관성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써봤습니다.


by 동두철액 | 2019/01/12 16:23 | 트랙백 | 덧글(10)

도배방지를 위해

저번 글에 한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이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량의 댓글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면 본인 블로그나 트위터에 하시기 바랍니다.

by 동두철액 | 2019/01/07 20:10 | 트랙백

사료비판으로 보는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

   광개토대왕비문은 부족한 고구려역사를 보충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비문이 거대하여 담고 있는 글자 수가 1775자나 되어 정보의 양도 많을 뿐 아니라 고구려 초기 역사, 광개토왕의 업적, 왕릉 관리 실태 등 내용도 다채롭습니다. 또 비 모양을 근거로 신라의 울진봉평비와 닮아 있어 고구려 문화가 신라로 전해지는 문화의 흐름이라던지 백잔 등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대외관, 추모나 홀본 등에서 알 수 있는 고구려인의 고유어 한자 표기방식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좌)와 울진봉평비(우). 모양이 닮아 있다.(출처 : 한민족대백과사전, 대구일보)




   이렇게 많은 정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건 신묘년조의 내용입니다. 신묘년조는 391년에 있었던 광개토대왕의 군사활동을 기록한 것인데 기록 자체는 32자로 총 비문의 글자 수의 1.8퍼센트 밖에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이유는 한일 양국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기 때문이죠. 한번 내용을 살펴봅시다. 


   백잔(백제를 낮추어 부르는 말)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라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건너와 백잔을 공파하고 …신라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이에 [영락(永樂)] 6년(396) 병신(丙申)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번역 출처 : 우리역사넷)
 

   내용을 요약하면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고 백제와 신라를 두고 고구려와 왜의 패권경쟁을 했다는 겁니다. 고구려 인이 직접 남긴 역사서는 현존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의 당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져 있어 신뢰성이 높습니다. 100여년전 조선을 강제병합해 중국대륙으로 침략하려는 일본에겐 신묘년조가 역사적 명분을 제공해줬습니다. 일본식민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 기록을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남선경영론으로 해석하는 근거로 활용하기도 하여 고대부터 일본은 조선보다 우위에 있었다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죠. 


   반면 우리나라에선 일본이 조선을 비하하는 식민사학의 영향력을 극복해야하는 시대적 과제가 있어서 여기에 반론을 가해야 했습니다. 비문내용을 다르게 해석하여 주어를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하여 고구려가 백제를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정인보의 주장이 대표적이죠. 심지어 비문 내용이 일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는데요 석회를 발라 비문을 일본측 의도에 맞게 윤색했다는 이진희의 주장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정인보의 주장은 한문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 봤을 때 상당히 어색한 해석이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진희의 주장은 중국학자 왕건군의 현지 조사결과 틀렸다는게 증명되었죠.


   그럼 일본 식민사학자 측 주장이 맞나? 아닙니다. 현재 일본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류의  남선경영론은 사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이 신묘년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사료비판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사료비판은 외적비판과 내적비판으로 나뉘어집니다. 내적비판은 텍스트 비판과 문맥적비판으로 세분화 하여 나누고 있습니다. 외적비판은 사료의 진위여부를, 내적비판은 사료의 내용을 분석하여 저자의 의도를 읽고 당대 사회문화적 환경을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입니다. 외적비판, 내적비판 어느 한 방법만 택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뤄져야 정확히 사료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죠.


   가장 먼저 외적비판을 합니다. 외적비판은 사료의 진위 여부를 살피는 것입니다. 즉 실제 진짜인지 아닌지를 따지고 파손된 비문 내용을 복원하는것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근대가 아니라 고구려 시대에 고구려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건 학자들간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보존되지는 못하는 상태며 일부 파손되어 파손된 부분에 대해선 학자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며 복원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글에서는 외적 비판부분은 이정도로만 다루겠습니다.


   다음으로 본론인 내적비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신묘년 조의 내용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는 겁니다. 글에는 저자의 의도가 들어가 있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짓말이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의도적이든 실수든 간에 착각을 하여 잘못된 내용을 서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세 유럽에선 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을 섞기도 한걸 생각하면 됩니다. 신묘년조도 항상 진실만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라 했지만 적어도 백제는 속민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왕까지 죽인 위협적인 존재였죠. 이 부분은 거짓말입니다. 왜가 바다 건너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부분도 거짓말이거나 과장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한반도 남부에는 왜계 무덤들을 근거로 두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왜계 무덤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왜계 무덤으로 나주의 전방후원분이 있는데 일시적인 기간에만 나타났으며 수많은 토착재치세력의 무덤들에 비하면 소수라 왜의 지배는 말이 안되는 것이죠. 오히려 용병정도로 해석함이 옳을 듯 합니다. 이렇게 보면 왜가 바다 건너 백제와 신라를 무력으로 지배했다는 건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왜 광개토대왕릉비에선 이런 거짓말을 쓴 것일까요? 고구려가 전쟁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백제와의 전쟁에서는 왕까지 전사한 고구려는 소수림왕대 부터 내정개혁을 통해 국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대에 이르면 정복전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죠. 문제는 전쟁입니다. 전쟁은 많은 인명피해를 낼수 밖에 없고 많은 자원이 소비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명분을 줘야 백성들이 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되는 핑계라도 명분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죠.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고 싶어했고 명분으로 왜라는 외부세력에 의해 백제, 신라가 고통받으니 이를 고구려가 구원해준다는 의유를 된 것입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가 엄밀한 역사서가 아닌 기념비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전국 곳곳에 있는 기념비들을 보면 좋은 내용만 적혀져 있지 나쁜 내용은 없습니다. 그것이 기념비의 속성입니다. 당연히 광개토대왕릉비도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홍보하여 찬양하려는 목적이 담겨져 있는 것이죠. 그러니 전공역시 과장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왜와의 전쟁에서도 약한 종족과 싸워 이겼다는 것보다 거대한 세력과 싸워 이겼다고 말하는 것이 폼이 나겠죠.



전두환 기념비. 기념비는 본래 인물이나 사건을 찬양하기 위해 건립었다. (출처 : 한겨레 신문)



   신묘년조에 대한 해석은 학계에서도 위에서 쓴 바대로 귀결되고 있는 듯 합니다. 이렇게 귀결되는 여러 선학들의 연구 덕분이죠. 이 글 역시 학계의 연구성과를 담은 여러 가지 책에서 보고 쓴 것이고요. 어떤 사료를 해석할 때 이렇게 사료비판을 거쳐야 좀 더 정밀한 해석이 나오는 거 같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신묘년조의 해석도 미래에 바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사회가 바뀌거나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면 해석을 바꿔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료든 간에 겸허한 마음을 갖고 사료비판을 하며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by 동두철액 | 2019/01/04 22:02 | 삼국 | 트랙백 | 덧글(19)

을지문덕에 대한 잡상

   을지문덕을 모르는 한국사람은 없을 겁니다.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장수로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을 좌절시킨 공이 있다고 정도는 상식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 덕에 일제시대 중국인들이 모여 살았던 코가네마치를 해방후 을지로로 바꾼것도 한국 정부가 그 지역 중국인들을 눌러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과거 수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을지문덕에서 따왔기 때문입니다.


현재 을지로의 모습. (출처 : 두산대백과사전)


   조금 더 공부한 사람들은 살수대첩이 수공으로 이겼다는 증거는 없었다는 점, 을지문덕이 우문술에게 보냈다는 시가 몇 안되는 현존하는 고구려시이라는 점, 시의 知足(만족함을 알고)이란 구절을 들어 고구려에 도교가 전래되었다는 증거라는 점 등도 알 겁니다.


   문제는 이게 을지문덕에 대한 거의 모든 기록이라는 겁니다. 삼국사기의 특성상 고구려 후기의 많은 기록들을 중국 사서에서 가져왔는데 을지문덕도 예외가 아닙니다. 을지문덕의 성품에 관한 부분과 김부식의 평가만 빼면 모든 행적을 중국기록에서 그대로 따왔으니 말이죠.


   이렇게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수가 국내에 기록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쉽기도 하고 의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을지문덕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을지문덕의 성을 을지라 보고 선비족출신의 위지경덕의 성인 위지와 을지가 같다고 치고 을지문덕을 선비족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고구려는 다민족 국가라 그럴듯 하게 보이나 을지문덕의 성이 을인지 을지인지 을지문인지도 모르고 을지문덕이 이름일 수도 있기에 좀 더 연구해야 될 거 같습니다.


   과거에도 을지문덕의 정체를 알기 위해 노력했던거 같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을지문덕의 가계를 모른다고 기록해뒀으나 조선중기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양사람이라는 기록이 등장하며 조선후기 역사서인 해동명장전에선 평양 석다산 출신이라 말합니다. 후대로 갈수록 출신지가 자세히 밝혀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 추측으론 조선시대 사족들이 성리학적 기풍을 높이기 위해 충의 상지인 을지문덕을 끌여들어 삼국사기와 민간설화를 바탕으로 사료 비판없이 결론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양의 사족들이 온달전설을 만든것 처럼 말이죠. 그렇지만 당대인들이 을지문덕에 대한 탐구의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 대공원에 있는 을지문덕 상. 군사정권을 미화를 위해 활용되기도 했다. (출처 : 서울경제) 

by 동두철액 | 2018/12/31 21:49 | 삼국 | 트랙백 | 핑백(1) | 덧글(7)

고려 초반부 이야기8

   정기대감으로 임명된 왕건은 곧 한강 이북의 양주(지금의 서울)와 견주(지금의 양주)를 공략하는데 성공합니다. 뒤이어 서기 900, 이번엔 한강 이남으로 원정을 떠납니다. 그리고 여기서 큰 성과를 냅니다. 광주, 청주, 충주, 당성(지금의 화성), 괴양(지금의 괴산) 등의 군현을 공략하는데 성공한 것이죠. 그런데 왕건이 원정에 성공했다는 건 순전히 강한 군사력으로 적을 격파하는 것만으로 이룬 것은 아닐 겁니다. 이 점은 광주의 왕규, 충주의 유긍달, 청주의 김긍률과 왕건이 인척관계를 맺었던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왕규는 세 명의 딸을 왕건 일가에 시집을 보냅니다. 두 명의 딸은 왕건에게 한 명의 딸은 왕건의 아들 이자 고려2대왕인 혜종에게 보냈던 것이죠. 이 중 왕건에게 시집보낸 두 딸을 하나가 광주원군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유긍달도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은 고려 3대왕과 4대왕인 정종과 광종을 낳았죠. 김긍률도 왕건의 아들인 혜종에게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왕건이 인척관계를 맺을 정도면 사이가 상당히 돈독했고 서로 존중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는 왕건이 해당지역을 점령할 때 협조한 대가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이 원정으로 왕건은 많은 인맥을 얻습니다. 전쟁으로 원한보다 인맥을 얻는 모습을 볼 때 왕건은 대단한 인물임은 틀림 없는 거 같습니다. 참고로 이 때 형성된 인맥이 고려 초기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한강 이남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자 궁예는 기뻐하며 아찬직을 제수합니다. 당시 태봉에선 9개 등급의 관등제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아찬은 6번째 관등입니다. 벼슬이 그리 높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지만 궁예가 왕건의 활약에 인상을 받았던 것은 분명한 거 같습니다. 이제는 알아서 기는 송악의 호족이 아닌 일국의 장수로서 대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금성, 그러니까 지금의 나주 원정의 책임자로 왕건을 임명합니다.





< 태봉의 영역이 남쪽으로 확장 된 것은 왕건의 활약이 기여했다. >



  

   궁예가 양길을 무찌르고 한강 이남까지 공략하는 데 성공하자 견훤과 경계를 맞닿게 됩니다. 궁예나 견훤이나 삼한의 패권을 장악하고 싶은 것은 매한가지라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견훤이 차지했던 옛 백제 땅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백제 멸망시 호구수와 고구려 멸망시 호구수가 엇비슷하게 남은 것으로 봤을 때 영토에 비해 인구가 많았던 거 같습니다. 전근대 농업국가의 국력이 대체적으로 인구에 비례한다고 볼 때 백제 땅은 발전가능성이 높은 땅이었죠. 미개척지가 많았던 당대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한반도에서 기후가 따뜻하고 평야가 많은 곳이라 농사가 잘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 말 사남해의 호족들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경제적 부를 얻었죠. 이를 바탕으로 건국된 후백제가 강한 군사력을 키울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전 견훤과 싸우기 위해선 전면전만으론 승리할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발상을 전환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치기로 결정한 겁니다. 한반도 최남단 오늘날의 나주가 있던 금성을 공략한다면 후백제를 언제든지 후방에서 교란할 수 있을 것이고 후백제의 힘은 약화될 수 밖에 없겠죠. 때마침 궁예에겐 금성을 공략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습니다. 해상세력이었던 왕건의 수군이 있었고 왕건의 한수 이북과 이남 공략으로 군사적 재능이 있다는 게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903년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 바다를 거쳐 금성을 공략하게 됩니다.



by 동두철액 | 2018/12/29 17:14 | 고려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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