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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 초상 속의 숭정

윤증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이름을 날린 파평윤씨 가문 출신으로 조선시대 정치인이자 대학자였던 윤선거의 아들입니다. 그는 일찍이 송시열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학문적으로도 명성을 날려 여러 차례 조정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명해진 것은 송시열과의 논쟁 덕분입니다. 기대승과 이황 사이에 있었던 훈훈한 논쟁이 아니었고 쌍욕을 하지 않고 주먹만 들지 않았지 사제간에 붓으로 서신을 오고가며 피터지게 싸운 논쟁입니다. 논쟁의 원인은 아버지 윤선거가 예송논쟁으로 사이가 멀어진 윤휴와 송시열을 화해시키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송시열이 이를 계기로 윤선거를 미워하게 되었고 이후 송시열은 윤증에게 윤선거의 묘지명을 써달라고 부탁받자 그의 행적을 비판하는 묘지명을 적었습니다. 통상 묘지명에는 좋은 말만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송시열의 이런 행동에 윤증은 크게 분노하게 됩니다. 이것이 논쟁의 시발점이 되고 회니시비로 발전되게 되었죠.

 

 

회니시비를 계기로 서인은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윤증을 따르는 소론으로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윤증은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대 학자인 만큼 그를 따르는 문인들이 많았고 이 거물급 인사의 초상이 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런데 윤증의 초상은 한 번 그려진 뒤 후대 화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모사되었고 지금도 여러점 남아 있습니다. 그 중 5점의 윤증의 초상과 1점의 전적이 윤증초상일괄이란 이름으로 보물 149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윤증 초상은 역사적이든 예술적이든 이야기거리가 많지만 이번 글에선 연호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연호는 군주가 자기 치세연차에 붙이는 칭호입니다. 오늘날에는 예수 탄생을 기준으로 서기나 단군이 건국 했을 시점으로 하는 단기를 써서 시기를 나타냈는데 과거 우리나라에선 주로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여 시기를 나타냈습니다.

 

 

윤증 초상 중 측면전신좌상에도 연호가 적혀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숭정기원후재갑자사월모(崇禎紀元後再甲子四月摹)라 묵필로 적혀져 있는데 초상이 그려진 시기를 알려줍니다. 여기서 숭정기원후재갑자가 몇 년을 나타내는 것이 핵심인데 명 의종의 연호가 1628년 무진부터 시작되니 숭정원년 이후 두 번째 갑자년이므로 1744년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의종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당하기 직전 목을 매어 세상을 떠난 년도가 1644년 이므로 숭정황제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나서도 숭정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윤증 초상 일괄의 초상 중 1점은 장경주가 2점은 이명주가 그렸다. 나머지 초상은 누가 그렸는지 미상이다. (출처 : 두산백과)

 

잘 알다시피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에 입성한 후 명은 멸망했습니다. 그 후 이자성은 청군에 쫓겨 진압되었고 강남에는 청군에 맞선 남명 정권이 들어서긴 했지만 모두 진압되었습니다. 즉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선 이후에도 조선은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후국은 천자국의 연호를 따릅니다.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청에 굴복하고 청에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 되었기에 공식석상에선 천자국인 청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윤증 초상에 숭정 연호를 사용한 건 무슨 의미일까요?

 

 

중국 왕조는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라고 하고 주변 국가를 라고 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천자국으로 높이고 주변 국가를 오랑캐라 하여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왕조는 이러한 華夷관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당연히 오랑캐가 중국 왕조와 관계를 맺을 때는 반드시 조공-책봉관계로 맺었습니다. 조공은 주변 국가가 사신을 보내 중국 왕조를 다스리던 천자에게 인사드리고 주변 국가에서 나는 토산물을 바치는 행위며 책봉은 천자가 주변 국가의 왕에게 작위를 하사하고 그 땅을 내려주는 행위입니다. 조공-책봉관계가 맺어지면 중국 왕조는 주변국에게 하사품을 내리고 주변 국가는 복종의 의미로 중국 왕조가 하사한 달력과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러한 외교관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긴다 하여 섬길 에 클 자를 써 사대관계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실제 천자국이 주변국가를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한적은 많지 않습니다. 그보다 사대관계는 형식적인 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형식적인 조공-책봉관계는 한반도 국가들도 받아들여 우리 역사에선 매우 익숙한 일이었고 중국의 연호 사용은 낯선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조선도 조공-책봉 질서 속에서 명에 사대를 하였습니다. 문제는 조선 초기 까지만 해도 명에 진심으로 사대를 했다기 보다 어쩔 수 없이 복속했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중국 왕조는 힘이 강했고 조선은 약했기 때문에 국가 안보상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지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은 고려시대 사대관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형세를 살펴서 사대를 한다 하여 형세적 사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 중기가 되자 성리학의 가르침에 철저한 사림세력들이 향촌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향촌질서를 성리학 중심으로 바로 잡은 후 정치적으로도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외교정책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성리학은 남송에서 나온 새로운 유학으로 화이관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림들은 당연히 화이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했고 조선은 중국 왕조가 강해서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학을 낳은 중화문명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대관을 명분론적 사대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을 겪자 명이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게 되고 실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조선 사대부들은 명이 조선에게 베푼 은혜를 再造之恩이라 하여 명분론적 사대의식을 극대화 됩니다. 선조를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임진왜란의 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선 관군이나 의병의 활약상을 낮추고 명에 대한 은혜를 강조하여 이러한 의식을 키우는데 일조합니다.

 

 

그런데 선조 말엽부터 여진족의 힘이 강해지고 후금이란 나라까지 세우자 이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직후 여진족을 군사적으로 방비할 힘이 조선에겐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 명에 무조건 적인 사대의 예를 표방하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후대 학자들이 부르는 소위 중립외교란 것을 하며 전쟁을 막아보려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명에 대한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를 섬기는 행위로 인식되었습니다. 성리학 이념을 국가 정책에 실현하고자 하는 성리학자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광해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파행적인 궁궐공사와 수 많은 옥사를 일으켰고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유폐 같은 폐륜적인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하게 됩니다. 그런데 새롭게 정권을 잡은 인조 정권은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을 위해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명이 조선에게 베푼 은혜를 더욱 더 강조하며 지성사대를 외치게 됩니다. 즉 명분론적 사대관이 더 강해지고 있었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조선 사대부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죠.

 

 

그러나 조선의 사대관과는 별개로 현실에선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고 청으로 국명을 바꾼 여진족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되자 꼼짝없이 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청에 사대의 예를 표방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청의 연호를 사용해야만 했죠.

 

 

그런데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라 청이 아니라 명을 섬겨야 합니다. 명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문명의 적법한 계승자라 섬겨야 하는 데다 조선을 도와줬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은혜를 갚아야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명은 멸망했고 조선은 명의 복수를 위해 청을 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명을 위해 청에 대한 복수 하자는 북벌론이 조선 정국에 나돌기 시작했고 실제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효종이나 숙종 대 남인정권이 실행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라는 것을 조선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에 의해 끊겨버린 중화문명을 조선이 간직하고 보존하여 언젠가 복수하자는 정신승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주에서 시작된 중화문명을 이제는 중국이 아니라 조선에서 받들자는 것입니다. 이 중화문명의 핵심은 바로 성리학이며 성리학이 발달한 조선이야 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존주론입니다. 주는 천명을 받아 은을 치고 주도권을 잡은 중국의 왕조로 공자가 동경했다는 문화와 존경했다는 주공이란 인물 모두 이 나라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존주론은 주로부터 시작된 유학을 조선이 계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와 함께 중국에는 끊긴 중화문명이 조선에서 이어나간다는 자부심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이 곧 중화다라고 생각하는 조선중화주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숭정 이후 명의 명맥이 끊겼냐?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명정권이 청에 항거하고 있었고 남명정권도 저마다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선 남명정권의 연호를 사용하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명정권보다 청이 명의 계승자라는 인식마저 갖고 있었죠.

 

 

이것은 당대 조선 사람들은 중화문명의 계승자는 남명이나 청이 아니라 조선이라 여겨 청이나 남명의 연호를 사용할 수도 사용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은 현실적으로나 성리학적 명문으로나 천자국이 될 수도 없습니다.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을 기리는 것이 성리학적으로 맞는 행동이었습니다. 조선 정부에선 어쩔 수 없이 청과의 외교 분쟁을 막기 위해 청의 연호를 사용할 수밖엔 없었지만 일반 사대부들이 사적으로 숭정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 연호를 사용이 일반화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창덕궁에 대보단을 설치하여 명 의종을 기린다던지 만동묘에 명 의종의 글자체로 非禮不動이란 글귀를 암벽에 새긴다던지 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남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숭정이라는 연호를 사적에서 계속해서 사용한 것이죠. 앞서 언급한 윤증 초상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문과의 소과에 해당하는 사마시(진사시)의 합격자 명단인 사마방목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숭정연호로 표기된 방목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불교계도 숭정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숙종 시기 만들어진 현재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개운사 숭정기원후팔십년명 범종도 숭정연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왕실에서도 숭정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영조 재위시기에 세워진 사천의 세종의 태실지의 표석에도 숭정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문집에서 숭정연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개항기까지 이어집니다. 유림들이 많이 참가한 을미의병 때도 의병장들의 격문에 숭정연호가 많이 나타납니다.

 

 

조선이 숭정이란 연호를 계속해서 사용했던 것은 단순히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는 생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닌거 같습니다. 물론 조선이 진심으로 망한 명을 그리워하고 섬기려고 한 정서는 분명히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보다는 숭정이라는 연호를 쓰는 것 자체가 중화문명을 지키는 것이고 중화문명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조선이란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 생각하며 서양에서 만들어진 민주주의를 연구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것과 말입니다.

 

by 동두철액 | 2019/09/13 17:34 | 조선 | 트랙백

황룡사 9층 목탑과 고증 오류

사극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고증 오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상이나 무기 등 소품에 관한 오류, 혹은 인물의 행적을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게 그려내거나 아니면 극중과는 전혀 다른 시기의 요소를 혼돈하여 그려내는 등의 오류를 들 수 가 있죠.

 

 

그중 극의 배경이 되는 시기와는 다른 시기의 물건이나 용어, 생각 등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멸의 이순신 같은 경우 기생의 입을 빌려 노산군이 아직 단종으로 추숭되지 않았음에도 단종이라는 말을 버젓이 쓴다던지, 근초고왕에선 고구려 후기에나 나타나는 막리지라는 관직을 사용하는 주요 인물이 나온다던지, 대조영에서는 발해가 건국되었을 때는 이미 죽었어야 할 설인귀가 버젓이 활동한다던지 등 시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오류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극에 고증오류가 있는 건 사극이란 단순히 과거 역사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작가가 과거를 통해 대중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고증을 추구하되 100%맞게 고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역사서 역시 이와 비슷하게 고증오류를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서를 쓰는 역사가들 역시 사극 작가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이야기를 재연하여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습니다. 과거 역사를 역사가의 관점으로 재조직하고 이야기함으로서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죠.

 

 

일연의 삼국유사가 바로 이와 예에 들어맞습니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고려 말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시대 역사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동기는 몽골의 고려 침략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삼국유사의 탑상편은 사찰과 탑에 대한 신이한 이야기인데 삼국유사의 다른 편목과 달리 일연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답사했음을 들어내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를 통해 저술 동기를 추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특히 탑상편의 기사 30개 항목 중 황룡사와 관련된 항목이 무려 4항목이나 되고 여기서 몽골의 병화로 인한 피해사실을 3군데나 집어넣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몽골의 고려 침략이 저술 동기라는 추론이 가능해지죠.

 

 

그 중 황룡사에 대한 항목 중 하나가 황룡사9층 목탑에 관한 것입니다. 일연은 자장이 나라를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어떻게 황룡사 99층 목탑을 세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설을 상세히 전하면서 9층 목탑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탑이 소실된 시점을 고종16년 무술 겨울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집어넣었습니다. 이로서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매우 나라에 매우 중요한 보물이 몽골 침략에 사라졌다는 한탄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황룡사9층 목탑.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밝혀진 것이 없다. (출처 : 우리역사넷) 



 

실제 황룡사 9층 목탑은 지금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최고의 목탑으로서 경주나 불교에 한하지 않고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가 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예술가들에겐 여러 가지 영감을 부여했을 겁니다. 또 지자체에서 우후죽순 건설되는 케이블카나 구름다리처럼 황룡사9층 목탑을 모방한 목탑들이 전국 곳곳에 세워졌을 지도 모릅니다.

 

 

황룡사가 불타기 전에 황룡사를 직접 찾았던 경험이 있는 일연으로서는 폐허가 된 황룡사를 보고 오늘날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 보다 더 큰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해가 사찰뿐 아니라 백성에게까지 미쳤음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몽골의 침략과 같은 외침의 원인을 삼국유민의식이 해소되지 않은 고려사회에 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단군이란 시조를 내세워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고 불교가 삼국시대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내세워 몽골의 침략으로 후유증을 겪는 고려사회의 통합을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물이 삼국유사인 것이죠.

 

 

당연히 앞서 언급한 황룡사 9층 목탑을 통해서도 무언가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황룡사99층 목탑은 신라 불교의 상징물로서 국가를 수호하는 신비한 뜻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탄 사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9층의 의미에 대해 안홍이 저술한 동도성립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라 제27대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다. 비록 도는 있지만 위엄이 없어서 구한이 침략하였다. 만일 용궁 남쪽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나라가 침략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이다.”

 

 

그런데 일연이 자신의 저술 목적이 앞섰는지 고증 오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세세히 읽어보면 선덕여왕 당시 시대상과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먼저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줄기차게 신라를 공격하고 압박했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신라가 처음부터 의도하여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당과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에 맞서다 삼국통일과 같은 사건으로 이어졌다라고 설명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그 정도로 신라는 국가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주적인 백제와 고구려가 있어야 할 텐데 빠진 것이 이상합니다.

 

 

물론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있습니다. 응유를 백제의 낮춤말로 볼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제왕운기에서 백제를 응준, 나투로 불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두 매와 관련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응유의 응 역시 매를 뜻하고 응유와 응준은 비슷하기 때문에 백제의 비칭으로 볼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종족 역시 여러 가지 설이 있긴 하지만 고구려 땅에 살고 있는 족속이 예맥인들 인데다 고구려를 맥구려라고도 불리었기 때문에 예맥을 고구려의 비칭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신라 안보에 위협적인 대상이었던 일본에 대해선 비칭 대신 정식 국호로 써주고 거란족을 나라 국자를 붙여 단국이라고 한 것을 생각했을 때 고구려와 백제의 정식 국호가 나오지 않은 점은 조금 의아스럽습니다.

 

 

게다가 오월이란 나라는 510국시기에 있었던 나라로 선덕여왕시기에는 아예 건국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오와 월을 통칭해서 묶어서 부른다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일본이란 표현도 의문입니다. 일본이란 국호를 신라가 인식한 건 문무왕의 재우 시절인 670년입니다. 다이카 개신으로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가 변경된 것이 신라까지 알려진 것이죠. 따라서 선덕여왕 치세에는 국호가 일본이 아니라 왜였습니다.

 

단국도 문제입니다. 단국은 거란이 세운 나라를 뜻할 텐데 거란이 나라 비스무리하게 세력을 형성된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시기이며 요라고 불리는 나라를 세운 건 신라가 망하기 직전의 일입니다.

 

 

거기에 여적, 이것도 문제입니다. 여적은 분명 여진을 일컫는 말임에 분명할 텐데 선덕여왕 당시 여진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여진이란 말은 여진이란 말은 발해 멸망 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진은 읍루, 물길 등으로 불리다 선덕여왕 당시에는 말갈이라고 불렸습니다.

 

 

즉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동도성립기의 내용은 황룡사 9층 목탑이 건립되는 시점과는 다른 시대에 저술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위의 내용을 종합했을 때 최대한 당겨 잡아도 신라 말에 쓰였음은 분명합니다. 즉 나말여초의 어떤 사람이 신라의 고승인 안홍의 이름을 빌려 자기 책의 권위를 높이려 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일연이 황룡사 9층 목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신비한 뜻이 서려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채록하여 적어놓은 것이죠. 일연은 사극과 같이 고증오류를 낸 것입니다.

 

 

당연히 사극이나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로 인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고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며 긍정하거나 비판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건설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왜 저자의 의도에 비추어 이러한 고증 오류가 왜 나왔는지 생각을 한다면 재미를 느끼면서 풍성하게 생각할 여지가 있을 거 같습니다.

by 동두철액 | 2019/09/08 14:26 | 고려 | 트랙백 | 덧글(3)

세형동검, 망각에 대한 두려움

우리나라 어느 역사 관련 박물관에 가도 꼭 있는 유물이 있습니다. 바로 세형동검입니다. 한반도에서 주로 출토되어 한국식 동검이라고 불리는 이 동검은 한반도의 청동기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를 알려주는 상징적인 유물이기도 하죠. 이러한 세형동검을 보는 관람객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역사적 지식이 있는 사람은 교과서에서 배운 청동기 시대 내용을 확인할 것이고 예술적 감각이 있는 사람은 청동 특유의 푸른빛이나 세형동검의 모양에 매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인과 같이 온 사람은 세형동검이 있든 없든지 간에 가슴이 띌 것입니다. 학교나 부모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학생은 건성으로 지나칠 것이고 학생들을 인솔해온 교사나 부모는 여러 가지 해설을 하려고 시도할 것 입니다. 또 박물관을 여러 번 돌아본 사람들은 세형동검은 여기도 있다고 하며 지겨워하겠죠.

 

왜 이런 이야기를 했냐 하면 세형동검의 용도에 비추어 볼 때 관람객들의 반응은 너무나 의외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세형동검은 잘 아시다시피 청동기로 만들어졌습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구리보다 단단하며 녹이 잘 쓸면서 푸른빛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청동을 희귀하게 여기며 종교적 의기로 많이 만들어 쓰이게 되죠. 그런데 이 청동은 종교적 의기 외에 또 다른 용도가 있습니다. 바로 무기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죠. 청동은 잘 깨지는 성질이 있어 농기구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청동은 금속이기 때문에 잘만 가공하면 사람의 살은 잘 꿰뚫을 수 있습니다.

 


때마침 농업생산력 증가로 불평등이 발생하고 높은 신분의 지도자들에 의해 전쟁이 빗발치게 됩니다. 그래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청동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사람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살상할 수 있을지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검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에 이용해보니 결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죠. 예를 들어 사람은 어떤 물체에 찔리면 근육이 순간 경직되어 근육이 인체에 들어온 물체를 꽉 잡아버리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체의 자율방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덕분에 외부로의 출혈이 멈추게 되는 것이죠. 실제 칼이나 작살 같은 것에 찔렸을 때 뽑으면 안 되고 꼽힌 상태로 병원에 가야 산다는 것도 출혈을 막아 사망에 이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이유입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동검으로 사람을 찔렸을 때 상대방의 근육이 경직되어 칼이 뽑히지 않는 현상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번 찌르고 동검이 빠지지 않으면 그 순간에 적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혈구, 즉 피 홈이라 하여 검신에 홈을 파서 그 사이로 피가 나오게 하는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칼에 찔린 사람의 피는 빠지고 근육 사이로 공기가 들어가 칼을 쉽게 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칼을 또 한 번 찔러 확실하게 목숨을 끊게 하거나 다른 상대를 노릴 수 있게 되겠죠.



 

<세형동검. 칼자루가 분리되어 만들어지는 데 이는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동검의 특징이다.>



그런데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효율적인 무기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장하게 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끔찍한 세형동검을 대량생산하게 됩니다. 거푸집을 만들어 거기다 미리 녹인 청동을 부으면 대량생산이 가능한 것이죠.


 

그리고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형동검 특성상 찌르는 데 특화되어 있는데 베기에 특화될 수 있게 동거의 무게중심을 칼자루에서 검신 쪽으로 가도록 개량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무기 발달사 측면에서 볼 때 찌르는 용도의 검에서 베는 용도의 도로 옮겨가고 있었다는 것을 볼 때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사람들도 효율적 살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형동검의 살상능력에 외경심을 가진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세형동검을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으로 쓰기 시작했고 족장이나 유력한 사람이 죽었을 때 같이 묻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세형동검은 당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살상능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최첨단의 무기입니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금지하려고 노력하는 ABC무기로 까지 비견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이러한 끔찍한 무기를 보는 우리들의 태도는 정말 덤덤합니다. 왜 우리는 덤덤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시간이 오래되어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동기 시대 때 어떤 전투가 몇 번 일어났는지, 전투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발생했는지, 가해자들은 어떤 흉악한 의도를 가졌으며 반성을 했는지 안했는지, 피해자들은 얼마나 죽고 다치며 인권을 유린당했는지, 피해자 가족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고 슬퍼했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전쟁이 벌어졌다라는 사실 외에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거의 모든 것이 잊혀 졌기 때문이죠.

 

 

이와 비슷한 일은 몽골의 고려 침략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몽골의 고려 침략으로 고려인들은 몽골인들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것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전쟁과 달리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고려시대 각종 문집 등에서 기록되어 있어 고려인들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인들은 몽골의 고려 침략을 이유로 몽골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친근감 있게 느낍니다. 침략의 원흉인 칭기즈칸이나 쿠빌라이에게 영웅적 행보(?)에 호감을 느끼거나 민족적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몽골제국의 팽창과정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몽골의 침략으로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알고 지적으로 희열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칭기즈칸의 영광을 잃어버린 몽골에 동정심을 갖는 모습도 보이죠. 역시 시간이 오래된 탓입니다. 몽골에게 고려가 침략당하가고 고통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기억하지만 고통스러웠고 끔찍했던 감정 자체는 잊혀 졌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일본이 생각이 납니다. 일본은 조선에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죠.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식민지 조선인들을 2등 시민으로 취급했을 뿐 아니라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운영 등 온갖 나쁜 짓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여기에 대해 반성의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국제법과 같은 법리적 해석과 인권문제 등 도덕적 문제를 거론하며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지요. 청동기 시대 사람들과 몽골의 침략과 다른 것은 일본의 침략의 후유증은 현재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나 강제징용 피해자 분들이 엄연히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국제적 범죄를 저질렀을 때 입을 싹 닫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권이 발전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일본이 일본제국의 만행에 의해 나타난 한국인 피해자 분들께서 다 돌아가실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이 저지른 범죄를 시간 속에 묻어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참고문헌

조진선(2001), 세형동검의 제작와 기능변천, 호남고고학보13

제작가 맞는 거 같은데 제목에 로 되어 있습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i/view.do?tabId=01&code=0&subjectId=ti_003&levelId=ti_003_0030#self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34407

by 동두철액 | 2019/08/17 16:16 | 잡상 | 트랙백 | 덧글(4)

성주, 장군과 경영자, 과학자

김부식이 분류한 신라의 시기구분법은 오늘날에도 신라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특히 신라 하대의 경우 진골들의 왕위다툼으로 신라사회가 무너져가는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혜공왕 즉위 이후 진골귀족의 왕위다툼이 격화되었습니다. 혜공왕이 시해된 후 선덕왕을 지나 원성왕이 즉위하면 왕계가 무열왕의 후손들이 아닌 원성왕의 후손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왕권이 약화되고 왕족들이 소가족 중심으로 분지화되면서 진골귀족 가문끼리의 왕위 다툼이 심해집니다.

 

 

진골귀족들이 왕위 다툼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무력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만 충성하는 사병들을 양성하게 되는 것이죠. 문제는 사병들을 양성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듭니다. 사병들 중에 다수는 농사를 짓지 않는 상비병일 것이고 이들의 급료와 무기, , 숙소 등을 제공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될 것입니다. 진골귀족들은 지방 곳곳에 농장을 만들어 비용을 충당했을 것입니다. 덧붙여 진골귀족들이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 혹은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감당하기 위해 드는 비용도 필요하기에 이 비용 모두 일반 백성에게서 과도하게 수취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진골귀족들의 왕위 다툼이 한창일 9세기가 되면 기근이 반복되고 또한 중앙조정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진골귀족들이 조세수취를 하는 데 한계가 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진골귀족들은 지방의 촌주 등 지방재지세력들의 힘을 빌려야했고 이들 지방재지세력들은 진골귀족의 권위를 빌려 성장해 갔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고 김헌창의 난 진압 이후 신라조정의 지방장악력은 현저히 낮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후삼국 시대가 도래한 거죠.

 

 

문제는 이렇게 신라조정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신라조정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것은 중앙권력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지방농민 뿐 아니라 지방재지세력에게도 큰 혼란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갑자기 대한민국 정부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각 지방에 살고 있는 일반 국민들은 여러 가지 혼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치안은 누가 유지할 것이며 세금은 누구에게 내고 자녀들 교육은 어떻게 시켜야 하며 직장은 어떻게 다녀야 할지 말이죠. 일반 국민 뿐 아니라 시청의 공무원들이나 경찰 공무원, 군인들도 누구의 지휘를 받고 어떻게 국민들에게 다가가가야 할지 혼란일 것입니다. 결국 누군가는 나서서 이러한 질서를 잡아줘야 했습니다.

 

 

신라 말의 사회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신라 말 사회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과도한 조세징수로 몰락한 농민들이 도적이 되어 지방 곳곳을 횡행했고 기근은 계속 이어져나갔습다. 골품제 질서가 무너져 각 군현이나 기관의 상하관계는 깨져 상호대립이 심해졌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조율하고 중재할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누군가가 성주, 장군으로 불리는 호족들입니다. (호족을 정의할 때 그 범위가 넓기 때문에 이 글에선 일정 영역의 독립적 지배자인 성주, 장군 만을 대상으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들 성주, 장군은 각 군현의 중심이 되는 치성을 중심으로 군현을 장악하고 질서를 바로 잡는데 성공합니다. 이들은 어떤 능력이 있었기에 각 지방사회의 질서를 잡을 수 있었을까요? 이들의 능력에 대한 기록을 살펴봅시다.

 

 

- 매곡성주 공직 :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다.

- 골암성수 윤선 : 사람됨이 침착하고 용감하였고 병법에 능했다. 무리를 모아 2천여 명에 이르렀다. 골암성에 거하면서 흑수번의

                        무리를 불렀다.

- 압해현적수 능창 : 수전에 능해 수달이라 불렀다. 망명자를 불러 모았고 드디어 갈초도 소적과 더불어 서로 결합했다.

- 수창군호국의영군장 이재 :

   1)드디어 높은 언덕을 택하여 의보를 축성했다.

   2) “지역민을 편하게 돌보고 마땅히 법등을 환히 들어 빨리 병화를 막아야 한다.

- 벽진군장군 이총언 : 신라 말 벽진군을 보호했다. 당시 군도가 들끓었는데, 견고하게 성을 지켜 백성이 이에 힘입어 편안했다.

 

 

위에 제시한 기록들에게서 주목할 점은 경제적, 재지적, 족적 기반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로지 이들이 가진 군사적 능력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군사적 능력만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이들 성주, 장군들이 어떻게 자신의 세력기반을 구축했는지 생각해보면 될 것입니다. 통설에선 지방재지세력인 촌주 층이 성장하여 호족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성주나 장군 밑의 호족들은 통설되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영역을 다스리던 독립적 지배자였던 성주나 장군 층의 경우는 지방재지세력출신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실상 많은 수의 성주나 장군들은 자신의 출신지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 외부지역을 무력으로 장악한 경우가 많습니다. 윤선이나 능창은 무리를 규합하여 다른 지역을 정복했다는 것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재의 경우 그가 본래 6두품 관등을 가진 것을 추정하건데 신라 조정에서 해당지역으로 파견되어 그 지역을 장악했을 것입니다. 견훤의 아버지로 유명한 아자개는 본래 가은현 출신이지만 상주를 장악한 케이스입니다. 궁예와 견훤 역시 자신의 출신지와는 상관없는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장악했었죠.

 

 

이것은 이 성주, 장군들은 다른 지역을 장악할 만한 군사적 능력이 있음을 뜻하며 이것이 당시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근본적으로 성주, 장군들의 경우 지방재지세력가나 농민들에게는 외부에서 온 침략자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군사 기반을 지방사회의 질서를 잡는데 사용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적떼를 막거나 이웃 군현과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사법 재판관 노릇을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혼란을 겪던 지방사회에선 성주나 장군들의 군사적 능력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즉 성주나 장군은 질서를 잡아줄 수 있는 당시 사회 구성원들이 바라는 인간상이라고 볼 수 있죠.

 

 

2020년을 앞둔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 구성원이 바라는 능력이 존재합니다. 위인전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위인전은 아이들에게 꿈과 목표를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가 잘 들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인전의 인물들을 보면 애플사의 스티븐 잡스, 한글과 컴퓨터의 이찬진, 쥐라기 공원을 제작한 스티븐 스필버그, 현대그룹을 세운 정주영, V3로 유명한 안철수,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등입니다. 한마디로 경영, 과학, 예술 등 전문분야에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번 인물들입니다.

    


<who시리즈. 안철수씨 뿐 아니라 유재석씨, 김연아씨 등 여러 현대 인물들을 주제로 위인전을 낸다.>


 

이는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선 경제적 부가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가 종전에는 2차 산업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했지만 이제는 3차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죠. 그래서 위인전도 이와 맡게 인물들을 선정하게 된 듯합니다. 이렇게 시대가 바라는 능력은 바뀌어도 언제나 시대는 사람들에게 상황에 맞는 능력을 요구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한국사신론

손흥호(2019), 9세기 전반 신라의 사회 변동과 지방사회, 대구사학135

최종석(2004),나말여초 성주, 장군의 정치적 위상과 성,한국사론500

박용국(2005),신라 헌덕왕대 김헌창의 난과 진주지역,퇴계학과 한국문화37

김정은(2000), 서점가를 점령한 21세기형 위인전, 출판저널2860

 

by 동두철액 | 2019/08/07 16:14 | 트랙백

고려 숙종은 15대가 아닌 14대 임금이라 자처했는가?


2001년 통전이란 책이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통전은 중국 송대에 만들어진 역사책인데 보통 동아시아의 역사책이 군주를 기준으로 군주나 대신들의 업적을 서술한데 비해 이 책은 경제, 관직, 예법 등의 제도사에 대한 책입니다. 그래서 역사서를 정치에 활용하던 중국이나 한국에서 대단히 많이 읽힌 책인지라 희귀한 책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발견이 주목받은 이유는 장서인이 찍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서인은 책이나 그림, 글씨의 소장자가 자기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 찍는 도장입니다. 도서관에서 대출, 관리하기 용이하게 바코드 스티커를 붙인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스티커에는 바코드 외에 XX도서관이라고 글귀를 보셨을 겁니다. 어디 소유인지 알려주기 위함이죠. 이와 같이 2001년에 발견된 통전은 고려왕실 소유라는 장서인이 찍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高麗國 十四葉 辛巳歲 御藏書 大宋建中靖國 元年 大遼乾通 元年

고려국 십사대 신사년 어장서 대송건중정국 원년 대요건통 원년

 


궁내청 서릉부에서 발견된 통전에 찍힌 장서인의 내용은 위와 같습니다. 이 글귀에서 당대 사회상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 습니다. 그 중 십사엽(十四葉)이란 단어에 주목해 봅시다.

 

 

십사는 숫자고 엽은 세대 혹은 후손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고려국 십사엽 신사세 어장서란 고려국 십사대 임금이 재위하는 신사년에 왕실에서 이 책을 보관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따라 붙는 대송건중정국 원년과 대요건통 원년은 각기 송과 요의 연호를 말합니다.

 

 

그런데 고려 14대 왕이라면 헌종인데 학자들은 이 책을 숙종시기에 만들어진 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헌종 재위기간은 1094년부터 1095까지. 이 기간 동안 신사년은 없습니다. 게다가 헌종 재위기간에는 송과 요에서 각기 건중정국과 건통이란 연호가 쓰이지 않았습니다. 송의 건중정국 원년과 요의 건통 원년은 모두 1101년을 가리키므로 숙종 6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숙종은 15대 임금이죠. 그럼 왜 14대라고 쓴 것일까요?

 

 

일단 장서인을 만든 사람이 실수로 잘못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하게 됩니다. 본래 고서에는 오기가 많기 때문에 충분히 고려할 만한 가정입니다. 하지만 숙종 재위기간을 생각하면 잘못 썻을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합니다. 왜 그런지 숙종의 즉위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죠.


 

숙종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자의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지요. 헌종은 11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이도 어린데다 몸도 허약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권신이었던 인주이씨 가문의 이자의와 헌종의 숙부였던 계림공이 후계구도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자의는 자신의 조카인 한산후 왕윤을 왕위에 올리려 했고 계림공은 이를 역모라고 판단하여 이자의 일파를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헌종에게 양위를 받아 계림공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숙종입니다. 그리고 전왕인 헌종은 2년 뒤에 죽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이야기 아닙니까?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김종서 일파를 몰아내고 어린 단종에게 양위 받은 것과 구도가 유사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후대에 학자들 중엔 이자의가 역모를 꾀한 것이 아니라 계림공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장애물이었던 이자의를 제거했다는 견해를 내놓는 학자도 있습니다.


 

숙종도 자신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왕권 강화를 위해 부단히 애를 씁니다. 숙종대 계획되었던 여진정벌, 동전 발행, 국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교육 강화 등이 그 예입니다. 특히 서적포를 두어 서책을 출판하는 등의 행위는 지방의 사학을 누르고 중앙의 국학을 강화시키려는 것인데 이런 중차대한 일에 도장을 잘못 파서 찍는 다는 것이 용납이 될지 의문입니다. 14대라고 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 보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것은 숙종이 헌종을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점입니다. 그래야 본인의 쿠데타 행위가 희석될 것이니까요. 실제 그러한 정황은 여러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숙종은 분명 헌종에게 양위를 받을 때 현왕인 숙종과 전왕인 헌종의 이름으로 요에 사신을 보내 양위의 정당성을 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양위 후 2년 만에 헌종이 죽자 숙종은 헌종의 죽음을 요에 알리는 고애사라는 사절단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통상 왕이 죽으면 상국에 알리는 것이 관례임에도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뿐 만이 아니죠. 헌종이라는 묘호도 숙종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음 왕인 예종대 가서야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조선에서 노산군이 죽고 한참 있다 숙종대 가서야 단종이란 묘호가 내려진 것보다는 빠릅니다만 어찌됐든지 간에 숙종은 헌종에게 묘호를 내려주지 않을 만큼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통전에 찍힌 장서인에 숙종을 14대 임금이라고 한 점은 결국 숙종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여 왕권강화를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듯합니다. 이는 후대에 세종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위해 선대왕인 공정대왕(숙종 때 정종이란 묘호를 받음)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아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공정대왕을 뺀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합니다.



이렇게 장서인을 통해 당대 사회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송과 요의 연호가 함께 나온 점,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실제 발견된 장서인이 찍힌 도서의 차이, 고려 어장서가 일본으로 건너간 사연, 고려 왕실에서 통전을 보관한 이유 등을 살피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다음 글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한민족대백과사전

https://news.joins.com/article/4075549

김남규(1996), 高麗中葉對女眞政策-宣宗, 肅宗代를 중심으로-, 가라문화13

박연호(2009), 고려 시대의 도회(都會)에 대하여 숙종, 인종 대 교육 진홍책의 맥락에서-, 교육사연구, 191

남인국(1983), 고려 숙종의 즉위과정과 왕권강화,국사교육론집5

 

 


by 동두철액 | 2019/07/31 19:13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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