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loos | Log-in


몽골, 운남, 제주도4 - 주원장

   바사라와르미 일가와 제주도를 연결시켜준 사람이 주원장입니다. 주원장은 빈농출신으로 떠돌이 승려가 되기도 했다가 원말 홍건적의 난 등으로 원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홍건적의 일원이었던 곽자흥 밑으로 들어가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는 종국엔 명을 세워 중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몽골을 몽골초원으로 쫓아내 새로운 역사를 열었죠. 빈농출신으로 중국 통일왕조의 황제가 된 사례는 아마 주원장이 유일한 듯 싶습니다. 한고조 유방을 주원장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유방은 장년에 시험을 쳐서 사수정의 정장이 될 정도로 주원장 보다는 지위도 있고 먹고 살 만큼의 재산도 있었습니다. 이로 미뤄볼 때 주원장의 능력은 대단한 거 같습니다.

 주원장은 빈농 출신이라 농민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명이 태평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야 하고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선 농민들을 짓밟는 지주 계층을 눌러야 한다는 생각을 품은 듯합니다. 그래서 지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행보를 보입니다. 그런데 주원장은 지주 계층만 누른 게 아닙니다. 자신을 도운 공신들도 철저하게 숙청시켰습니다.

 좌승상 호유용이 일본과 내통하여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믿지 못할 이유로 그와 그를 따르는 1천명의 신하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주원장의 사돈이자 공신중의 공신이고 어떤 죄를 지어도 죽이지 않겠다는 면사철권을 번이나 받은 이선장과 그 일족도 호유용과 연계되었다는 이유로 처형했죠. 몽골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남옥도 역모를 꽤했다는 이유로 그와 그와 연관된 1천명의 신하를 처형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원장은 무지막지하게 처형함으로서 본인 생각에 주씨 일가가 안정되고 평화롭게 다스릴 있는 나라를 만든 같습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자인했던 그에게도 특이한 면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적의 가족에 대해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주원장이 중국을 통일하기 까지 몽골 말고도 주변에 있는 많은 군벌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진우량입니다. 진우량은 원의 하급관리 출신으로 무예에 능통하여 원말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군벌이었던 서수휘의 휘하에 들어가서 활동하다 서수휘를 죽이고 대한이란 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 사람입니다. 주원장과 진우량은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고 마침내 파양호에서 주원장이 승리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진우량은 전사했고 둘째 아들 진리는 포로로 잡힙니다. 그런데 희안한 일이 발생하죠. 주원장이 진리의 목숨을 살려주고 귀양을 보내는 걸로 끝냅니다. 전근대 사회는 본인도 모르는데 황제 후보로 거론만 되도 역모로 몰릴 수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황제라고 칭한 라이벌의 가족을 살려주는 것은 놀라운 관용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주원장이니까 말이죠.


파양호. 면적이 3,210km2로 제주도의 약1.8배에 이른다. 주원장과 진우량이 전투를 벌일태의 호수 면적은 지금의 절반 정도이나 거대한 호수임엔 틀림없다.(출처 : 바이두백과)


 또 다른 군벌이었던 명옥진의 경우 대하라는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했지만 명옥진 본인이 사망하고 나라에 내분이 일자 주원장의 군세에 의해 쉽게 멸망합니다. 하지만 주원장은 명옥진의 자손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려 목숨을 살려주고 역시 곳으로 귀양 보냅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사라와르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by 동두철액 | 2019/02/13 16:17 | 교류 | 트랙백 | 덧글(2)

몽골, 운남, 제주도3 - 원의 통치

   이 밖에도 운남은 원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원이 베트남과 미얀마를 침략할 때 운남을 지나갔기 때문이죠. 이렇게 운남은 원의 입장에선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럼 이 중요했던 지역을 누가 다스렸을까요? 몽골의 통치 특성상 중앙집권제보다는 봉건제에 가까운 정치를 했습니다. 그래서 쿠빌라이의 서자 후게치와 그 후손이 대대로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리고 몽골의 지배층들을 도울 경제와 재정을 담당했던 서아시아 출신의 색목인들도 많이 이주해 왔습니다. 훗날 명 영락제 실절에 남해 대원정을 주도했던 정화는 이슬람 교도의 후손이었는데 운남 출신인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한족들 역시 들어오게 되어 운남이 한화(漢化)가 되는 배경이 됩니다.



   원의 운남 통치도 순조롭게 이뤄진 건 아닙니다. 쿠빌라이가 확립한 원 정권은 100년도 안되서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가장 큰 이유는 차별 정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에선 종족을 기준으로 몽골인-색목인-한인-남인 순으로 계층을 분리하고 차별통치를 했습니다. 3번째와 4번째를 해당하는 한인과 남인의 경우 몽골인이나 색목인에 비해 관리임용과 조세부문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죠.



원의 종족별 통치 체제(출처 :zum학습백과)


   관리임용에서 종족차별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원전장(元典章)이란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전장은 원 세조(쿠빌라이 카안)부터 영종때 까지의 원의 군사, 통지체제, 법령 등을 수록한 책입니다. 여기서 관리 임용 실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급관료인 정관 22500명 중 인구3%에 해당하는 몽골인과 색목인이 6782명이고 인구 97%를 차지하는 한인과 남인은 15718명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1:32인데 임용비율을 보면 1:2.3입니다.

 

 

   과거제도 문제가 됩니다. 중국에선 이미 당대 이후 송대가 되면 과거가 일반화 되었고 대단히 공정성 있는 시험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재상이더라도 자식이 과거에 합격할 수 있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회는 열려있었고 수많은 사대부들이 과거 합격을 위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몽골이 중국에 원을 세운 후 과거보다는 인맥을 통한 관리임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황실과의 인맥관계를 근각(根脚)이라 했는데 근각의 유무에 따라 관리임용을 했던 것입니다. 몽골인과 색목인은 근각을 갖기 쉬웠고 세 번째 계층인 한인까지도 어떻게 든 근각을 갖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항이 심했던 남송 사람들로 구성된 남인의 경우는 근각을 갖기 힘들었습니다.

   과거제에 익숙하여 차별을 싫어했던 유학자들에겐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원 조정에서도 한족들을 달래거나 관리수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원조정에선 과거가 갖는 장점인 공정성에 대해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시험과목을 종족별로 나누었고 합격자를 발표할 때도 몽골인과 색목인은 우방(右榜), 한인과 남인은 좌방(左榜)에다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방향을 달리하여 발표한 것은 몽골사람들은 한족들과 다르게 오른쪽을 높게 봤기 때문입니다. 몽골인이 과거에 합격했을 경우 6품관을 제수했지만 한인과 남인은 한 등급 아래인 7품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원 치하의 관직 진출이 끊겨버린 많은 유학자들은 자신들 처지를 장인이나 사냥꾼, 의사보다 낮고 거지보다는 좋은 정도라고 자조하기도 했습니다.



   일반 백성들 역시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예를 들어 송대에 지주전호제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는데 북송대의 지주전호제에 비해 남송대의 지주전호제가 더 지주와 전호간의 차별이 심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은 지주전호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또 이전글에서 언급했던 알탄호의 상인들이 원의 황실과 귀족들에게 받은 자금으로 고리대금을 한 것도 백성들에겐 반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데 기후변화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떨어지고 전염병까지 돌아 반감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됩니다



   결국 백련교의 교주였던 한산동이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처형되고 백련교 신자였던 유복통이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황제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홍건적의 난입니다. 이 홍건적의 난으로 곽자흥, 진우량, 장사성 등의 반란세력이 나타나게 되고 여기에 차별받은 유학자들이 가담을 합니다. 최후의 승자였던 주원장이 이끄는 명군이 몽골을 몽골초원으로 쫒아냈습니다

   하지만 아직 운남행성은 명에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명은 군대를 파견하여 운남행성을 공격합니다. 당시 운남행성에선 양왕 바사라와르미가 명군에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쿠빌라이의 혈통을 이은 그는 운남에 남아 티베트와 사천루트를 통해 몽골과 연락을 하고 있었죠. 그렇지만 1381년 주원장의 군대에 패배했고 자살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주도와의 연관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바사라와르미의 일가가가 포로로 잡혀 살아남은 것입니다.

 

by 동두철액 | 2019/02/08 18:36 | 교류 | 트랙백 | 덧글(4)

古조선의 古에 대한 이야기

   단군신화에 대해선 여러가지 버전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일 것입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빠진 삼국시대이야기를 전설과 불교설화위주로 취합한 책입니다. 크게 역사를 다루는 왕력편과 기이편, 불교 관련 설화를 다루는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으로 구성됩니다.
    기이편 첫번째로 나오는 것이 고조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이편 고조선조의 기사를 보면 중국의 위서와 우리측 기록으로 보이는 고기를 인용해 각각의 단군신화버전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이편의 첫번째 기사 제목이 조선이 아니라 고조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다닐 때 고조선을 배우는 데 조선에 고가 붙은 건 단군이 세운 조선과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용어이며 일연이 삼국유사를 썼을 때는 아직 고려시대였습니다. 즉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지는 이 시대사람들은 몰랐다는 소리죠. 그래서 삼국유사에서 나온 고조선은 이성계의 고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 쓴 건 아니라는 거죠.


삼국유사 기이편 첫번째 기사인 고조선조. 제목이 조선이 아니라 고조선이다. (출처 : 우리역사넷)


   그럼 조선이 아니라 고조선이 본래 용어이지 않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 고조선조는 제목이 고조선이고 본문에는 조선이란 말이 나옵니다. 삼국사기에도 고조선이 아닌 조선이란 말이 나오고 고려시대 오등작제도의 첫번째 등급인 국공 중 조선국공이 있는데 고조선국공이 아님에 주목해야합니다. 고조선의 고자는 무언가와 구분을 짓기 위해 붙인 접두사라고 봐야 합니다.

    그럼 어떤 조선과 구분했냐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옵니다. 바로 위만조선입니다. 기이편 고조선조는 기자가 고조선에 봉해졌다는 구당서 배구열전의 내용을 인용하고 통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는걸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위만조선을 제목으로 한 위만조선조 기사가 나오죠. 즉 조선이란 명칭이 같은데 조선의 통치자가 단군, 기자, 위만인지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연은 단군과 기자가 다스린 조선을 연속성이 있는 동일한 정치체로 보고 위만이 통치하는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접두사로 고자를 붙여 조선이라 한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구분은 제왕운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제왕운기에선 단군이 세운조선을 전조선 기자가 다스리는 조선을 후조선 위만이 찬탈한 조선을 위만조선이라 구분지었습니다.

   이처럼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용어도 찬찬히 뜯어보고 분석하면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을수 있습니다.  한가지를 보고 여러가지를 아는 것이 지적 즐거움이 아닌가 합니다.

by 동두철액 | 2019/02/05 17:14 | 잡상 | 트랙백

몽골, 운남, 제주도2 - 소금

   운남이 몽골인에게 경제적으로 중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소금이 생산되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물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석유와 같이 생산지가 제한되었고 또 석유를 석탄으로 대체할 수 있듯이 대체하 듯 소금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물질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소금을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엄청나게 노력을 했죠.


   그런데 중국의 역대 통치자들은 소금의 중요성을 알고 생존을 담보로 하여 세수로 활용하게 됩니다. 바로 전매제의 실행이죠. 중국 역대 왕조는 전통적으로 소금을 전매하였습니다. 한의 무제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세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재원을 마련했는데 그 중 하나가 소금 전매였습니다.


   당 후기의 안록산의 난으로 당 중앙정부는 힘을 잃고 국토가 절도사가 다스리는 여러 개의 번진으로 나눠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각 번진은 세금을 중앙으로 올려보내지 않고 번진에서 자의적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당왕조는 세수 부족의 직면하게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강회 지역의 번진은 경우 당왕조에 충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활용하여 제오기와 유안 등이 염법을 개정해 소금 전매재를 실시하였습니다. 마침 강회지역이 소금 생산지고 당왕조에 충성하던 터라 효과는 톡톡히 봤죠. 그래서 여기서 확보한 세금으로 당왕조는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송에서도 소금 전매는 유지하여 국가가 독점 판매하는 관매법을 실시하였다가 북송 중기에 소금의 유통과 판매 부분에 상인을 활용하는 통상법으로 바뀝니다. 이로 인해 염상은 대자본을 축적하게 되었죠.


   송을 점령한 원 정부는 송과 중국 역대왕조의 소금전매와 소금전매가 주는 막대한 이익에 대해 금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몽골인들은 중국의 세법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금을 점령했을 때 약탈적 관행을 버리고 금의 관리였던 야율초재의 건의를 받아 중국왕조에서 실시했던 징세정책을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십로징수과세소를 설치하고 호를 단위로 세금을 걷은 바 있습니다.

   소금 전매는 원 중앙 정부 세입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소금 전매를 실시했던 것일까요? 먼저 관아에서 운영하는 제염장이 있습니다. 송과 마찬가지로 원에서도 관아의 감독하에 소금 생산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소금을 판매하고 싶은 상인이 있습니다. 이들 상인들은 아무렇게나 제염장에 가서 소금을 살 수 없습니다.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하죠. 그러면 국가의 허가를 어떻게 받냐? 바로 상인들이 소금 판매 허가증인 염인을 사야 합니다. 염인은 국가에서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것이죠. 상인은 국가에서 발행하는 염인을 사서 제염장으로 가고 그곳에서 소금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소금을 아무데다 파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미리 지정한 장소에서 소금을 판매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염인을 살 때 지불하는 판매 대금이 원 중앙정부 세수의 80%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정말 압도적인 비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염인은 부를 불러다 주는 증서이기 때문에 염인 그 자체로 가치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염인은 하나의 종이 증서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고액 화폐로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소금 전매가 중앙 정부의 수입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원의 재정에도 막대한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원은 송의 여러 부분에서 경제정책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그 중 하나가 종이돈인 교초입니다. 중국은 통상 구리로 만든 동전을 활용하였지만 구리 생산량 부족으로 한계가 있었습니다. 특히 상업경제가 발전한 송과 원에서는 더욱더 부족함을 느꼈겠죠. 그래서 종이 돈이 활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종이돈은 종이에 글자와 숫자를 써놓은 증서에 불과했지만 금이나 은, 구리 등 무언가를 담보할 수 있는 물건이 있으면 종이돈의 가치는 보장이 됩니다.


   그런데 교초는 금속화폐가 아니라 마음 먹으면 마음 먹은 만큼 마구 찍어낼 수 있습니다. 담보 가치 이상 찍어내면 결국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교초의 신용도가 떨어집니다. 실제 원에선 중원초라는 교초를 남발하여 신용도가 떨어져 지원초라는 교초를 다시 찍어냅니다. 그런데 지원초가 원이 멸망할 때 까지 신용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염인 때문이었습니다. 지원초는 염인의 판매대금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죠. 소금 전매 정책이 남발되던 교초의 신용도를 유지하여 원의 금융정책이 지속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의 입장에서 소금은 원의 경제를 유지할 수 있게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 소금 산지인 운남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운남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바다가 없습니다. 바다가 없음에도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금은 바다에서만 생산되지 않습니다. 과거 바다였다가 육지가 된 곳에 바다의 흔적인 소금이 남고 인류는 이 소금을 활용했습니다. 운남에는 염분이 함유된 지하수가 흘렀고 예부터 운남사람들은 이 곳에 우물을 만들어 우물을 만들어 소금물을 길러 냄비에 졸여 소금을 얻었던 것이죠. 원 정부에서는 몽골인 올제이우를 소금을 관리하는 직책인 위초로염사사제거에 임명하여 흑정(헤이징)이라는 곳에 파견합니다. 이 지역은 예나 청대나 소금 생산으로 번영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올제이우에게 염정제도를 정비하게 합니다.

 

 


인류가 소금을 얻을 때 지리적인 이유로 바다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소금동굴(좌), 소금우물(우)



by 동두철액 | 2019/02/01 18:04 | 교류 | 트랙백 | 덧글(2)

몽골, 운남, 제주도1

   몽골, 운남, 제주도. 역사적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지명입니다. 우선 속해 있는 국가가 다릅니다. 몽골이야 오늘날의 몽골이고 운남은 중국, 제주도는 대한민국이죠. 거리가 멉니다. 몽골에서 운남까지는 대략 2500km, 운남에서 제주까지는 대략 2600km, 제주에서 몽골까지는 대략 2300km입니다. 거의 정삼각형을 이를 정도로 상호간에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살고 있는 사람들도 다릅니다. 몽골에선 몽골인들, 제주도에는 한국인들, 운남에는 한족과 바이족, 티베트족 등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기후도 다르죠. 다르고 거리도 멀고, 사는 사람들도 다릅니다. 관광할 때를 제외하곤 접점이 없어 보입니다.





지도에서 붉은 색으로 색칠한 지역이 몽골, 제주, 운남이다.



   하지만 이는 현재의 관점일 뿐이고 과거에는 생각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몽골제국의 일원으로 말이죠. 지금의 몽골초원에서 시작한 몽골제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제국을 완성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유목사회에선 약탈물을 분배해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고 정복한 지역의 영토와 영민을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나눠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면 영토와 영민을 나눠줘야 했고 영토와 영민을 나눠주기 위해선 연쇄적으로 정복전쟁에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몽골제국의 확장의 원동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칭기즈칸은 자식들에게 토지와 영민을 나눠줬고  칭기즈칸의 자식들은 토지와 영민을 다스리게 되었죠. 이렇게 토지와 영민을 포괄하는 세력권을 울루스라 합니다. 이렇게 몽골제국은 여러 울루스로 구성된 국가라 볼 수 있습니다.




   몽골제국은 파죽지세로 서하, 서아시아와 러시아, 금을 점령해 갔습니다. 그런데 몽골이 가장 원하면서 끈임없는 저항으로 정복하기 힘든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남송입니다. 남송은 송이 여진족에 쫓겨 남쪽으로 피난와 생긴 나라입니다. 영토의 반을 잃었지만 막대한 농업생산력을 갖고 자원이 풍부하며 상업과 기술이 발달하는 등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죠그런데 송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보였으나 형편없는 군사력과 근시안적인 외교술로 허약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 거란, 여진, 몽골, 서하을 적으로 돌린 건 이들이 호전적인 탓도 있지만 송의 외교술도 한 몫했습니다. 그리고 적으로 돌아선 이들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막대한 공물을 내야 했죠. 몽골은 남송을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양양성 등에서 예상외로 큰 저항을 받았습니다. 실제 과거에도 남송은 금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여 나라를 보존한 바 있을 정도로 역량을 갖추었습니다.




   당시 남송 정복군을 이끌던 쿠빌라이는 전면전으로는 남송을 점령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군대를 동군, 중군, 서군 이렇게 셋으로 쪼개 남송을 포위하여 점령하는 작전을 펼칩니다. 남송 서쪽에 붙어 있던 대리국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죠. 동군은 아열대 기후로 인해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대리국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쿠빌라이는 남송 정벌에 성공했고 동생 아릭뵈케를 무찌르고 카안의 자리에 오릅니다. 쿠빌라이의 자손들이 다스리는 중국과 몽골 초원 일대의 울루스를 카안이 다스린다 하여 카안 울루스라 했고 중국식으로 원이라 불렀습니다




   원에선 자신들이 정복한 정복한 송과 금의 영토를 9개 구역으로 나누어 행성을 설치합니다. 이에 대리국에는 운남행성이 세워지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의 운남성의 전신이 됩니다. 그런데 이 땅은 남송 못지않게 경제적으로 중요한 땅이었습니다

   먼저 은광이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은은 당시 유라시아 대륙에서 통용되던 국제적인 화폐였습니다. 몽골인들은 상업에 관심이 많았고 부를 쌓기 위해서는 국제무역이 필수적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국제무역을 활성화를 위해 은을 잘 유통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즉 상인과 은 두가지가 필요했던 것이죠

   그런데 원의 몽골인들에겐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무역상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원에선 알탈호라고 불렀습니다. 원을 지배하던 몽골인들은 민호를 직업에 따라 분류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서아시아인들을 색목인이라 칭하며 재정 등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그 중 색목인 상인들을 알탈호로 편재하여 자금을 주어 몽골황제나 황후, 몽골귀족을 위하여 영리사업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줄 은이 필요했고 원 정부는 중국인들에게 포은이라는 명목으로 은을 징수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에는 은이 부족하여 은광개발이 절실했습니다. 마침 원의 서부지역의 재부, 경제를 담당했던 사이도 아쟈르와 그 일족이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운남의 은광을 개발하게 된 것이죠.

 


by 동두철액 | 2019/01/29 18:56 | 교류 | 트랙백 | 덧글(2)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