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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의 북진정책의 실패3(完)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 조선인들이 적극적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 농사를 짓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인구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건국되었을 무렵 인구는 500만으로 추정되나 이앙법과 같은 농업기술 발달, 고구마나 감자와 같은 구황작물 보급, 의학서적 편찬 등으로 인한 사망률 저하 등으로 19세기 말엽이 되면 1700만 정도까지 증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구가 많아지면 인구 부양을 위한 경작지가 느는 것은 당연지사이나 한반도 면적의 한계로 농경지는 늘지 않고 토지를 집약하여 활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토지를 집약적으로 활용하면 어느 정도 인구압을 견딜 수 있으나 질소비료나 농약, 품종개량 같은 혁신적인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한계에 이르게 된다.



<고구마와 감자. 중국과 다르게 구황식물로서 역할을 못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출처 : 국민일보>



결국 사람들은 새로운 토지를 구해야 했고 그 동안 개척되지 않은 평안도, 함경도 일대로 눈을 돌리게 된다. 실제 1648년 평안도, 함경도 인구를 기준으로 1910년이 되면 각각 12.6, 18배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함경도 땅은 척박하기 때문에 급격히 증가한 인구를 먹여살리지 못해 다시 삼남지방이나 두만강 건너로 인구가 배출되게 된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함경도 땅은 농업 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에 매력적이지 않았다. 아마도 청의 봉금정책으로 여진족의 위협에서 벗어났어도 조선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함경도에 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 조선 사람들을 함경도 지방까지 내몰게 되었고 이것이 고려 중기나 조선 초에 달성하지 못했던 대규모 사민을 가능하게 했다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사연구회, 한국사 길잡이, 지식산업사, 2008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연구, 너머북스, 2013

국사편찬위,신편한국사22, 2002

양승조, 19세기 후반 조선인 북방 월경이주(越境移住)의 장기적 조건으로서의 인구요소, 중소연구423, 2018

by 동두철액 | 2019/07/14 17:02 | 트랙백 | 덧글(2)

고려와 조선의 북진정책의 실패2


그런데 사민정책은 결국엔 실패했고 그로인해 고려는 동북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조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영토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이렇게 사민 정책이 실패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여진족들이 건재하여 전투가 빗발쳐 안전하지 못했다는 점도 있을 것이며 삼남지방과 달리 토지가 척박하여 매력이 떨어진 원인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사민된 사람들이 개척된 땅에 붙어서 살 절박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사민된 사람들은 고향 땅을 버리고 새로 개척된 북부 지방에 정착할 이유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고향땅에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민의 대상이 된 당사자뿐 아니라 당대 조정의 정책실행자들도 공감했던 사실이다. 그래서 역을 면제하거나 면천 등의 혜택을 당근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고려 시대나 조선 초기에는 인구가 적고 미개간지가 많았다. 고려 말부터 농장이 만들어지면서 연해지 등을 개간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개간된 땅은 많았는데 개간된 땅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한 현상이 발생했다.



그래서 조선의 지주들이 소작인들에게 소작을 주고 싶어도 사람이 귀한지라 소작인들이 땅을 방매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지주들은 안정적인 농업 생산을 위해 사람을 땅에 결박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노비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노비는 주인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주인에 의해 이동의 자유가 제약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노비들을 확보하기 위해 노비 종부법을 폐지하고 일천즉천을 밀어붙인 것은 이러한 사정이 있던 것이다. 먹고 살 수 있는 땅이 충분한데 누가 위험을 무릎쓰고 새로 개척된 땅에 가서 살고 싶었겠는가?




<조선 시대 노비 출처 : 한국민족대백과사전>

by 동두철액 | 2019/07/08 19:39 | 트랙백

고려와 조선의 북진정책의 실패1

고려가 동북9성을 개척할 때 싸웠던 상대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 중 완안부라 불리는 부족이었다. 고려는 완안부와의 치열한 전투 끝에 동북9성을 여진에게 반환하게 된다. 이윽고 완안부는 금을 세우고 요와 송을 무너뜨리며 금을 세워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고려가 완안부와의 항쟁을 포기했기에 완안부는 중원 진출에 집중할 수 있었고 이것이 금으로 발전했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조선의 46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에서 힘들게 4군을 개척하였지만 방어상에 불리함으로 인해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조 때가 되면 4군은 폐지되었다. 또한 조선은 6진만 개척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윤관이 공험진에 세웠다는 비를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두만강 보다 북쪽에 공험진이 있다고 주장하고 현재의 6진보다 북쪽으로 개척하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6진만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노선은 여진족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조선이 여진에 대한 관심이 줄자 여진족 사이에 조선의 영향력은 이전 보다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여진족들은 상호간 쟁투하며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고 결국 건주위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는 단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여진족의 성장이 단순히 고려와 조선의 북진정책의 후퇴라고만 보는 건 문제가 있다. 여진족 내부의 역량도 있고 중국 왕조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고려와 조선의 영향력도 일정 부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의 북진정책이 실패했던 원인은 무엇일까? 군사력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외에도 인구문제도 컸다고 생각한다. 새로 개척한 영토를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선 그 지역에 사람이 살아야 한다. 이들이 북방의 적과 맞서 싸우는 군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농사를 짓고 살면서 국가에 세금을 내면 재정도 좋아질 수 있다. 문제는 새롭게 개척된 영토엔 사람이 없으니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을 끌어와야 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사민정책이다.



윤관이 동북9성을 쌓았을 때 75천호를 사민시키려 했고 세종이 46진을 개척했을 때는 6진에 32백호를 사민시켰다. 이들이 새로 개척된 영토에 살며 북방의 적들로부터 땅을 지키고 자자손손 뿌리를 내려 영구히 영토를 만드려는 심산이었다.



<동북9성 위치 대한 학설은 많으나 어찌됐든 간어 세종의 북진정책의 역사적 명분을 준건 분명하다. 출처: 나무위키>






by 동두철액 | 2019/05/28 18:42 | 조선 | 트랙백

몽골, 운남, 제주도4 - 주원장

   바사라와르미 일가와 제주도를 연결시켜준 사람이 주원장입니다. 주원장은 빈농출신으로 떠돌이 승려가 되기도 했다가 원말 홍건적의 난 등으로 원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홍건적의 일원이었던 곽자흥 밑으로 들어가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는 종국엔 명을 세워 중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몽골을 몽골초원으로 쫓아내 새로운 역사를 열었죠. 빈농출신으로 중국 통일왕조의 황제가 된 사례는 아마 주원장이 유일한 듯 싶습니다. 한고조 유방을 주원장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유방은 장년에 시험을 쳐서 사수정의 정장이 될 정도로 주원장 보다는 지위도 있고 먹고 살 만큼의 재산도 있었습니다. 이로 미뤄볼 때 주원장의 능력은 대단한 거 같습니다.

 주원장은 빈농 출신이라 농민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명이 태평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야 하고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선 농민들을 짓밟는 지주 계층을 눌러야 한다는 생각을 품은 듯합니다. 그래서 지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행보를 보입니다. 그런데 주원장은 지주 계층만 누른 게 아닙니다. 자신을 도운 공신들도 철저하게 숙청시켰습니다.

 좌승상 호유용이 일본과 내통하여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믿지 못할 이유로 그와 그를 따르는 1천명의 신하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주원장의 사돈이자 공신중의 공신이고 어떤 죄를 지어도 죽이지 않겠다는 면사철권을 번이나 받은 이선장과 그 일족도 호유용과 연계되었다는 이유로 처형했죠. 몽골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남옥도 역모를 꽤했다는 이유로 그와 그와 연관된 1천명의 신하를 처형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원장은 무지막지하게 처형함으로서 본인 생각에 주씨 일가가 안정되고 평화롭게 다스릴 있는 나라를 만든 같습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자인했던 그에게도 특이한 면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적의 가족에 대해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주원장이 중국을 통일하기 까지 몽골 말고도 주변에 있는 많은 군벌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진우량입니다. 진우량은 원의 하급관리 출신으로 무예에 능통하여 원말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군벌이었던 서수휘의 휘하에 들어가서 활동하다 서수휘를 죽이고 대한이란 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 사람입니다. 주원장과 진우량은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고 마침내 파양호에서 주원장이 승리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진우량은 전사했고 둘째 아들 진리는 포로로 잡힙니다. 그런데 희안한 일이 발생하죠. 주원장이 진리의 목숨을 살려주고 귀양을 보내는 걸로 끝냅니다. 전근대 사회는 본인도 모르는데 황제 후보로 거론만 되도 역모로 몰릴 수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황제라고 칭한 라이벌의 가족을 살려주는 것은 놀라운 관용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주원장이니까 말이죠.


파양호. 면적이 3,210km2로 제주도의 약1.8배에 이른다. 주원장과 진우량이 전투를 벌일태의 호수 면적은 지금의 절반 정도이나 거대한 호수임엔 틀림없다.(출처 : 바이두백과)


 또 다른 군벌이었던 명옥진의 경우 대하라는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했지만 명옥진 본인이 사망하고 나라에 내분이 일자 주원장의 군세에 의해 쉽게 멸망합니다. 하지만 주원장은 명옥진의 자손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려 목숨을 살려주고 역시 곳으로 귀양 보냅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사라와르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by 동두철액 | 2019/02/13 16:17 | 교류 | 트랙백 | 덧글(2)

몽골, 운남, 제주도3 - 원의 통치

   이 밖에도 운남은 원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원이 베트남과 미얀마를 침략할 때 운남을 지나갔기 때문이죠. 이렇게 운남은 원의 입장에선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럼 이 중요했던 지역을 누가 다스렸을까요? 몽골의 통치 특성상 중앙집권제보다는 봉건제에 가까운 정치를 했습니다. 그래서 쿠빌라이의 서자 후게치와 그 후손이 대대로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리고 몽골의 지배층들을 도울 경제와 재정을 담당했던 서아시아 출신의 색목인들도 많이 이주해 왔습니다. 훗날 명 영락제 실절에 남해 대원정을 주도했던 정화는 이슬람 교도의 후손이었는데 운남 출신인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한족들 역시 들어오게 되어 운남이 한화(漢化)가 되는 배경이 됩니다.



   원의 운남 통치도 순조롭게 이뤄진 건 아닙니다. 쿠빌라이가 확립한 원 정권은 100년도 안되서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가장 큰 이유는 차별 정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에선 종족을 기준으로 몽골인-색목인-한인-남인 순으로 계층을 분리하고 차별통치를 했습니다. 3번째와 4번째를 해당하는 한인과 남인의 경우 몽골인이나 색목인에 비해 관리임용과 조세부문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죠.



원의 종족별 통치 체제(출처 :zum학습백과)


   관리임용에서 종족차별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원전장(元典章)이란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전장은 원 세조(쿠빌라이 카안)부터 영종때 까지의 원의 군사, 통지체제, 법령 등을 수록한 책입니다. 여기서 관리 임용 실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급관료인 정관 22500명 중 인구3%에 해당하는 몽골인과 색목인이 6782명이고 인구 97%를 차지하는 한인과 남인은 15718명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1:32인데 임용비율을 보면 1:2.3입니다.

 

 

   과거제도 문제가 됩니다. 중국에선 이미 당대 이후 송대가 되면 과거가 일반화 되었고 대단히 공정성 있는 시험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재상이더라도 자식이 과거에 합격할 수 있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회는 열려있었고 수많은 사대부들이 과거 합격을 위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몽골이 중국에 원을 세운 후 과거보다는 인맥을 통한 관리임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황실과의 인맥관계를 근각(根脚)이라 했는데 근각의 유무에 따라 관리임용을 했던 것입니다. 몽골인과 색목인은 근각을 갖기 쉬웠고 세 번째 계층인 한인까지도 어떻게 든 근각을 갖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항이 심했던 남송 사람들로 구성된 남인의 경우는 근각을 갖기 힘들었습니다.

   과거제에 익숙하여 차별을 싫어했던 유학자들에겐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원 조정에서도 한족들을 달래거나 관리수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원조정에선 과거가 갖는 장점인 공정성에 대해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시험과목을 종족별로 나누었고 합격자를 발표할 때도 몽골인과 색목인은 우방(右榜), 한인과 남인은 좌방(左榜)에다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방향을 달리하여 발표한 것은 몽골사람들은 한족들과 다르게 오른쪽을 높게 봤기 때문입니다. 몽골인이 과거에 합격했을 경우 6품관을 제수했지만 한인과 남인은 한 등급 아래인 7품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원 치하의 관직 진출이 끊겨버린 많은 유학자들은 자신들 처지를 장인이나 사냥꾼, 의사보다 낮고 거지보다는 좋은 정도라고 자조하기도 했습니다.



   일반 백성들 역시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예를 들어 송대에 지주전호제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는데 북송대의 지주전호제에 비해 남송대의 지주전호제가 더 지주와 전호간의 차별이 심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은 지주전호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또 이전글에서 언급했던 알탄호의 상인들이 원의 황실과 귀족들에게 받은 자금으로 고리대금을 한 것도 백성들에겐 반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데 기후변화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떨어지고 전염병까지 돌아 반감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됩니다



   결국 백련교의 교주였던 한산동이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처형되고 백련교 신자였던 유복통이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황제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홍건적의 난입니다. 이 홍건적의 난으로 곽자흥, 진우량, 장사성 등의 반란세력이 나타나게 되고 여기에 차별받은 유학자들이 가담을 합니다. 최후의 승자였던 주원장이 이끄는 명군이 몽골을 몽골초원으로 쫒아냈습니다

   하지만 아직 운남행성은 명에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명은 군대를 파견하여 운남행성을 공격합니다. 당시 운남행성에선 양왕 바사라와르미가 명군에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쿠빌라이의 혈통을 이은 그는 운남에 남아 티베트와 사천루트를 통해 몽골과 연락을 하고 있었죠. 그렇지만 1381년 주원장의 군대에 패배했고 자살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주도와의 연관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바사라와르미의 일가가가 포로로 잡혀 살아남은 것입니다.

 

by 동두철액 | 2019/02/08 18:36 | 교류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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