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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반부 이야기4

이 때 궁예가 반역죄를 터무니없이 꾸며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니 장수나 재상 중에서도 해를 입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되었다. 항상 스스로, “나는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체득하여 부인(婦人)이 음란한 짓을 저지른 것도 알아 낼 수가 있다. 내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아 그런 짓을 한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리라.” 하고 뽐냈다. 그리고 석자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쇠방망이를 불에 달궈 음부에 쑤셔 넣으니 여인네들이 입과 코로 연기를 뿜으며 죽어갔다. 이 때문에 부녀자들이 무서워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노가 날로 극심해 갔다.


- 고려사, 태조총서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한 사람들에 인식을 볼 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할 때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였기에 경제가 이 만큼 발전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노무현 대통령를 평가할 때 국민들이 좀 더 힘을 실어주었으면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자신이 지지하는 지도자에게 국민들이 힘을 실어줘야 리더십을 발휘하여 나라가 발전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고 자신이 지지하는 지도자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방해자이며 발전을 저해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섞여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역사인식에서도 투영되어 있는 듯 합니다. 지금은 유행이 잦아든 감이 있지만 정조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위한 성군이며 화합의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는 임금이지만 그 아래 정조를 따르지 않는 신하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다 정조의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라는 식입니다. 정조를 박정희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으로 치환해도 익숙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선 당연히 한 명의 지도자가 자신만의 뜻으로 정치를 이끌고 가는 건 불가능하고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독재자라고 비난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개개인마다 생각이 다르며 지도자의 생각이 꼭 옳다는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정조도 마찬가지겠죠. 지도자가 뜻을 이루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을 납득하게끔 설득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설득이 되지 않을 경우 충분히 비난을 받을 수 있고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죠.

 

  





현대에 그려진 정조 어진




   이점을 염두하고 궁예를 보면 그가 왜 실패를 했는 지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궁예는 삼한의 백성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비전을 제시했을 때 그 동안 궁예를 따랐던 고구려계 호족들은 반발했을 것입니다. 아직 어떤 세상인지는 모르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권한을 백제나 신라계 호족들에게 양보해야 했음은 분명했기 때문이죠. 자신의 이익을 줄이는 지도자에 대해 어느 누구라도 반발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반발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도자가 어떻게 설득하고 잘 이끌어 갈지가 문제겠죠.

  



   여기서 궁예는 리더십 강화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바로 독재죠. 궁예는 자신에게 익숙했던 불교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신격화 합니다. 자신을 미륵이라 부르는 것이죠. 미륵은 석가모니불이 입적한 후 나타나는 부처님으로 미륵이 설법을 하면 전 우주의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불교의 목적이 불성을 깨달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이 어리석음이 괴로움의 근원이기 때문에 미륵불의 설교는 백성들이 생각할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을 여는 열쇠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나말여초의 백성들은 신라 조정과 지방 호족들의 이중수탈, 그리고 초적의 등장, 호적간의 다툼으로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느꼈을 법합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궁예는 미륵이라 자청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거 같습니다.

  



   궁예가 미륵이라 자칭하기 위해선 우선 본인부터가 신비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 것이 바로 미륵관심법입니다. 본래 관심법이란 용어는 말 그대로 내 마음을 관찰하여 내면의 깨달음에 이르는 불교 수행방법입니다. 그런데 궁예는 관심법을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로 사용합니다. 실제 관심법은 궁예가 왕위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합니다. 미륵관심법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궁예는 미륵관심법으로 자신이 미륵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궁예가 미륵관심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 하더라도 그저 뛰어난 인간일 뿐, 왜 백성들이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지에 대한 권위가 필요합니다. 어떤 권력자든지 간에 권위가 없으면 존립하기 힘듭니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권위는 국민들의 투표권 행사로부터 나오고 북한에선 지도자의 권위가 백두혈통으로부터 나오는데 각기 민주주의와 주체사상이 뒷받침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불교의 부처님이 존경받는 건 수 있는 근거가 부처님의 언행을 기록한 경전이 있기에 가능했고 미륵임을 자청하는 궁예도 자신이 존경받을 수 있는 근거를 불경에 찾은 겁니다. 기존의 불교는 궁예를 미륵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20여권의 불경을 지어낸 것입니다. 개인이 궁예가 만든 불교경전의 내용은 현존하지 않아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당대 법상종 계열의 승려였던 석총이 혹평을 한 것을 봐서 기존의 불교와 차이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것을 보여주고 자신을 뒷받침해줄 불경이 있으니 백성들에게도 자신이 미륵이라는 것을 홍보해야 했죠. 글을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래서 행차를 활용합니다. 정조가 행차를 통해 백성들과 만나고 이를 자신의 정치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조처럼 궁예 역시 행차를 정치수단으로 잘 활용했습니다.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에, 행차 앞뒤로 향로를 받쳐 든 남녀 어린아이 수십 명을 세워 걷게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스러우면서도 장엄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궁예는 행차를 통해 백성들이 자신을 미륵이라 믿게 하여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고 싶어했을 것이고 백성들 중 일부는 분명 이 행차를 보고 궁예가 미륵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미륵관심법을 통해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고 자신을 증명해줄 수 있는 경전도 발간했고 행차를 통해 백성들에게 신비감도 안겨준 궁예는 후계문제에 대해서도 불교를 활용합니다. 여기에 자신의 두 아들도 청광보살 · 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한 점이죠. 미륵불이 자신이니 아들들을 보살로 비유할 법한 설정입니다. 마치 왕실자체를 불교의 일원으로 만든 것은 진평왕을 연상시킵니다만 궁예는 진평왕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볼 수 있습니다. 진평왕은 부처의 아버지 정도로만 자처했을 뿐이지만 궁예는 본인을 미륵불이라 했기 때문이죠.

  



   궁예의 정치는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웠던 많은 호족들이나 유교적 정치나 골품제도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겐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궁예는 자신을 뒷받침 해줄 사람들이 필요했고 자신을 지지하는 이흔함, 환선길, 아지태, 간총 등을 이용하여 측근정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편에 언급한 데로 청주 사람들을 철원으로 사민시켜 새로운 지지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궁예의 리더십은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거 같지 않습니다. 되레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늘려 났습니다.


by 동두철액 | 2018/11/17 11:11 | 고려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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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외세결탁 신라와 한국 at 2018/11/17 11:55
삼한시대의 근강모야신이 떠오르는군요.
남가라가 신라에 병합되자 왜는 근강모야신을 임나에 파견하게 되죠.
그런데 근강모야신은 임나를 통치하며 뜨거운 물로 참말과 거짓말을 가릴 수 있다며 사람들을 뜨거운 물에 담그게 하여 데어 죽게 만듭니다.
원성이 높아지자 왜는 근강모야신을 소환하게 되는데 가는 도중 대마도에서 병이 나 죽습니다.
Commented by 동두철액 at 2018/11/17 19:10
그렇군요. 저한테 근강모야신하면 그 개인의 인생보다 임나일본부가 안라왜신관이었다는 설이 먼저 머리속에 떠오르더라고요
Commented by 외세결탁 신라와 한국 at 2018/11/17 19:47
일본부는 후대에 개칭된 것이죠.
신라 박제상도 후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원래 이름은 모말 또는 모마리질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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