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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운남, 제주도3 - 원의 통치

   이 밖에도 운남은 원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원이 베트남과 미얀마를 침략할 때 운남을 지나갔기 때문이죠. 이렇게 운남은 원의 입장에선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럼 이 중요했던 지역을 누가 다스렸을까요? 몽골의 통치 특성상 중앙집권제보다는 봉건제에 가까운 정치를 했습니다. 그래서 쿠빌라이의 서자 후게치와 그 후손이 대대로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리고 몽골의 지배층들을 도울 경제와 재정을 담당했던 서아시아 출신의 색목인들도 많이 이주해 왔습니다. 훗날 명 영락제 실절에 남해 대원정을 주도했던 정화는 이슬람 교도의 후손이었는데 운남 출신인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한족들 역시 들어오게 되어 운남이 한화(漢化)가 되는 배경이 됩니다.



   원의 운남 통치도 순조롭게 이뤄진 건 아닙니다. 쿠빌라이가 확립한 원 정권은 100년도 안되서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가장 큰 이유는 차별 정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에선 종족을 기준으로 몽골인-색목인-한인-남인 순으로 계층을 분리하고 차별통치를 했습니다. 3번째와 4번째를 해당하는 한인과 남인의 경우 몽골인이나 색목인에 비해 관리임용과 조세부문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죠.



원의 종족별 통치 체제(출처 :zum학습백과)


   관리임용에서 종족차별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원전장(元典章)이란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전장은 원 세조(쿠빌라이 카안)부터 영종때 까지의 원의 군사, 통지체제, 법령 등을 수록한 책입니다. 여기서 관리 임용 실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급관료인 정관 22500명 중 인구3%에 해당하는 몽골인과 색목인이 6782명이고 인구 97%를 차지하는 한인과 남인은 15718명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1:32인데 임용비율을 보면 1:2.3입니다.

 

 

   과거제도 문제가 됩니다. 중국에선 이미 당대 이후 송대가 되면 과거가 일반화 되었고 대단히 공정성 있는 시험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재상이더라도 자식이 과거에 합격할 수 있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회는 열려있었고 수많은 사대부들이 과거 합격을 위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몽골이 중국에 원을 세운 후 과거보다는 인맥을 통한 관리임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황실과의 인맥관계를 근각(根脚)이라 했는데 근각의 유무에 따라 관리임용을 했던 것입니다. 몽골인과 색목인은 근각을 갖기 쉬웠고 세 번째 계층인 한인까지도 어떻게 든 근각을 갖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항이 심했던 남송 사람들로 구성된 남인의 경우는 근각을 갖기 힘들었습니다.

   과거제에 익숙하여 차별을 싫어했던 유학자들에겐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원 조정에서도 한족들을 달래거나 관리수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원조정에선 과거가 갖는 장점인 공정성에 대해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시험과목을 종족별로 나누었고 합격자를 발표할 때도 몽골인과 색목인은 우방(右榜), 한인과 남인은 좌방(左榜)에다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방향을 달리하여 발표한 것은 몽골사람들은 한족들과 다르게 오른쪽을 높게 봤기 때문입니다. 몽골인이 과거에 합격했을 경우 6품관을 제수했지만 한인과 남인은 한 등급 아래인 7품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원 치하의 관직 진출이 끊겨버린 많은 유학자들은 자신들 처지를 장인이나 사냥꾼, 의사보다 낮고 거지보다는 좋은 정도라고 자조하기도 했습니다.



   일반 백성들 역시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예를 들어 송대에 지주전호제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는데 북송대의 지주전호제에 비해 남송대의 지주전호제가 더 지주와 전호간의 차별이 심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은 지주전호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또 이전글에서 언급했던 알탄호의 상인들이 원의 황실과 귀족들에게 받은 자금으로 고리대금을 한 것도 백성들에겐 반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데 기후변화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떨어지고 전염병까지 돌아 반감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됩니다



   결국 백련교의 교주였던 한산동이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처형되고 백련교 신자였던 유복통이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황제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홍건적의 난입니다. 이 홍건적의 난으로 곽자흥, 진우량, 장사성 등의 반란세력이 나타나게 되고 여기에 차별받은 유학자들이 가담을 합니다. 최후의 승자였던 주원장이 이끄는 명군이 몽골을 몽골초원으로 쫒아냈습니다

   하지만 아직 운남행성은 명에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명은 군대를 파견하여 운남행성을 공격합니다. 당시 운남행성에선 양왕 바사라와르미가 명군에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쿠빌라이의 혈통을 이은 그는 운남에 남아 티베트와 사천루트를 통해 몽골과 연락을 하고 있었죠. 그렇지만 1381년 주원장의 군대에 패배했고 자살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주도와의 연관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바사라와르미의 일가가가 포로로 잡혀 살아남은 것입니다.

 

by 동두철액 | 2019/02/08 18:36 | 교류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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