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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의 북진정책의 실패1

고려가 동북9성을 개척할 때 싸웠던 상대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 중 완안부라 불리는 부족이었다. 고려는 완안부와의 치열한 전투 끝에 동북9성을 여진에게 반환하게 된다. 이윽고 완안부는 금을 세우고 요와 송을 무너뜨리며 금을 세워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고려가 완안부와의 항쟁을 포기했기에 완안부는 중원 진출에 집중할 수 있었고 이것이 금으로 발전했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조선의 46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에서 힘들게 4군을 개척하였지만 방어상에 불리함으로 인해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조 때가 되면 4군은 폐지되었다. 또한 조선은 6진만 개척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윤관이 공험진에 세웠다는 비를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두만강 보다 북쪽에 공험진이 있다고 주장하고 현재의 6진보다 북쪽으로 개척하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6진만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노선은 여진족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조선이 여진에 대한 관심이 줄자 여진족 사이에 조선의 영향력은 이전 보다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여진족들은 상호간 쟁투하며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고 결국 건주위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는 단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여진족의 성장이 단순히 고려와 조선의 북진정책의 후퇴라고만 보는 건 문제가 있다. 여진족 내부의 역량도 있고 중국 왕조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고려와 조선의 영향력도 일정 부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의 북진정책이 실패했던 원인은 무엇일까? 군사력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외에도 인구문제도 컸다고 생각한다. 새로 개척한 영토를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선 그 지역에 사람이 살아야 한다. 이들이 북방의 적과 맞서 싸우는 군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농사를 짓고 살면서 국가에 세금을 내면 재정도 좋아질 수 있다. 문제는 새롭게 개척된 영토엔 사람이 없으니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을 끌어와야 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사민정책이다.



윤관이 동북9성을 쌓았을 때 75천호를 사민시키려 했고 세종이 46진을 개척했을 때는 6진에 32백호를 사민시켰다. 이들이 새로 개척된 영토에 살며 북방의 적들로부터 땅을 지키고 자자손손 뿌리를 내려 영구히 영토를 만드려는 심산이었다.



<동북9성 위치 대한 학설은 많으나 어찌됐든 간어 세종의 북진정책의 역사적 명분을 준건 분명하다. 출처: 나무위키>






by 동두철액 | 2019/05/28 18:42 | 조선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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