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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 목탑과 고증 오류

사극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고증 오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상이나 무기 등 소품에 관한 오류, 혹은 인물의 행적을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게 그려내거나 아니면 극중과는 전혀 다른 시기의 요소를 혼돈하여 그려내는 등의 오류를 들 수 가 있죠.

 

 

그중 극의 배경이 되는 시기와는 다른 시기의 물건이나 용어, 생각 등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멸의 이순신 같은 경우 기생의 입을 빌려 노산군이 아직 단종으로 추숭되지 않았음에도 단종이라는 말을 버젓이 쓴다던지, 근초고왕에선 고구려 후기에나 나타나는 막리지라는 관직을 사용하는 주요 인물이 나온다던지, 대조영에서는 발해가 건국되었을 때는 이미 죽었어야 할 설인귀가 버젓이 활동한다던지 등 시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오류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극에 고증오류가 있는 건 사극이란 단순히 과거 역사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작가가 과거를 통해 대중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고증을 추구하되 100%맞게 고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역사서 역시 이와 비슷하게 고증오류를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서를 쓰는 역사가들 역시 사극 작가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이야기를 재연하여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습니다. 과거 역사를 역사가의 관점으로 재조직하고 이야기함으로서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죠.

 

 

일연의 삼국유사가 바로 이와 예에 들어맞습니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고려 말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시대 역사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동기는 몽골의 고려 침략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삼국유사의 탑상편은 사찰과 탑에 대한 신이한 이야기인데 삼국유사의 다른 편목과 달리 일연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답사했음을 들어내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를 통해 저술 동기를 추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특히 탑상편의 기사 30개 항목 중 황룡사와 관련된 항목이 무려 4항목이나 되고 여기서 몽골의 병화로 인한 피해사실을 3군데나 집어넣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몽골의 고려 침략이 저술 동기라는 추론이 가능해지죠.

 

 

그 중 황룡사에 대한 항목 중 하나가 황룡사9층 목탑에 관한 것입니다. 일연은 자장이 나라를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어떻게 황룡사 99층 목탑을 세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설을 상세히 전하면서 9층 목탑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탑이 소실된 시점을 고종16년 무술 겨울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집어넣었습니다. 이로서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매우 나라에 매우 중요한 보물이 몽골 침략에 사라졌다는 한탄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황룡사9층 목탑.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밝혀진 것이 없다. (출처 : 우리역사넷) 



 

실제 황룡사 9층 목탑은 지금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최고의 목탑으로서 경주나 불교에 한하지 않고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가 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예술가들에겐 여러 가지 영감을 부여했을 겁니다. 또 지자체에서 우후죽순 건설되는 케이블카나 구름다리처럼 황룡사9층 목탑을 모방한 목탑들이 전국 곳곳에 세워졌을 지도 모릅니다.

 

 

황룡사가 불타기 전에 황룡사를 직접 찾았던 경험이 있는 일연으로서는 폐허가 된 황룡사를 보고 오늘날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 보다 더 큰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해가 사찰뿐 아니라 백성에게까지 미쳤음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몽골의 침략과 같은 외침의 원인을 삼국유민의식이 해소되지 않은 고려사회에 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단군이란 시조를 내세워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고 불교가 삼국시대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내세워 몽골의 침략으로 후유증을 겪는 고려사회의 통합을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물이 삼국유사인 것이죠.

 

 

당연히 앞서 언급한 황룡사 9층 목탑을 통해서도 무언가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황룡사99층 목탑은 신라 불교의 상징물로서 국가를 수호하는 신비한 뜻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탄 사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9층의 의미에 대해 안홍이 저술한 동도성립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라 제27대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다. 비록 도는 있지만 위엄이 없어서 구한이 침략하였다. 만일 용궁 남쪽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나라가 침략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이다.”

 

 

그런데 일연이 자신의 저술 목적이 앞섰는지 고증 오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세세히 읽어보면 선덕여왕 당시 시대상과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먼저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줄기차게 신라를 공격하고 압박했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신라가 처음부터 의도하여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당과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에 맞서다 삼국통일과 같은 사건으로 이어졌다라고 설명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그 정도로 신라는 국가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주적인 백제와 고구려가 있어야 할 텐데 빠진 것이 이상합니다.

 

 

물론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있습니다. 응유를 백제의 낮춤말로 볼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제왕운기에서 백제를 응준, 나투로 불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두 매와 관련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응유의 응 역시 매를 뜻하고 응유와 응준은 비슷하기 때문에 백제의 비칭으로 볼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종족 역시 여러 가지 설이 있긴 하지만 고구려 땅에 살고 있는 족속이 예맥인들 인데다 고구려를 맥구려라고도 불리었기 때문에 예맥을 고구려의 비칭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신라 안보에 위협적인 대상이었던 일본에 대해선 비칭 대신 정식 국호로 써주고 거란족을 나라 국자를 붙여 단국이라고 한 것을 생각했을 때 고구려와 백제의 정식 국호가 나오지 않은 점은 조금 의아스럽습니다.

 

 

게다가 오월이란 나라는 510국시기에 있었던 나라로 선덕여왕시기에는 아예 건국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오와 월을 통칭해서 묶어서 부른다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일본이란 표현도 의문입니다. 일본이란 국호를 신라가 인식한 건 문무왕의 재우 시절인 670년입니다. 다이카 개신으로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가 변경된 것이 신라까지 알려진 것이죠. 따라서 선덕여왕 치세에는 국호가 일본이 아니라 왜였습니다.

 

단국도 문제입니다. 단국은 거란이 세운 나라를 뜻할 텐데 거란이 나라 비스무리하게 세력을 형성된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시기이며 요라고 불리는 나라를 세운 건 신라가 망하기 직전의 일입니다.

 

 

거기에 여적, 이것도 문제입니다. 여적은 분명 여진을 일컫는 말임에 분명할 텐데 선덕여왕 당시 여진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여진이란 말은 여진이란 말은 발해 멸망 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진은 읍루, 물길 등으로 불리다 선덕여왕 당시에는 말갈이라고 불렸습니다.

 

 

즉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동도성립기의 내용은 황룡사 9층 목탑이 건립되는 시점과는 다른 시대에 저술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위의 내용을 종합했을 때 최대한 당겨 잡아도 신라 말에 쓰였음은 분명합니다. 즉 나말여초의 어떤 사람이 신라의 고승인 안홍의 이름을 빌려 자기 책의 권위를 높이려 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일연이 황룡사 9층 목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신비한 뜻이 서려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채록하여 적어놓은 것이죠. 일연은 사극과 같이 고증오류를 낸 것입니다.

 

 

당연히 사극이나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로 인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고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며 긍정하거나 비판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건설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왜 저자의 의도에 비추어 이러한 고증 오류가 왜 나왔는지 생각을 한다면 재미를 느끼면서 풍성하게 생각할 여지가 있을 거 같습니다.

by 동두철액 | 2019/09/08 14:26 | 고려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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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남중생 at 2019/09/08 15:10
여진(女眞), 여직(女直), 여적(女狄)이라는 일련의 표기방식이 한쪽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행했을 것도 같은데... 고지도 등에 보이는 "여직"이라는 표기의 역사도 궁금해지네요 ㅎㅎ

"오월"은 "중화"와는 대비되는 중국 남부를 의미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근세 시대의 "남만" 개념처럼 말이죠.
Commented by 동두철액 at 2019/09/08 15:16
여직은 요흥종의 이름인 종진의 眞자를 피휘하기 위해 만든 용어죠.

오월을 중국 남부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Commented by 남중생 at 2019/09/08 15:20
아항!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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