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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 초상 속의 숭정

윤증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이름을 날린 파평윤씨 가문 출신으로 조선시대 정치인이자 대학자였던 윤선거의 아들입니다. 그는 일찍이 송시열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학문적으로도 명성을 날려 여러 차례 조정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명해진 것은 송시열과의 논쟁 덕분입니다. 기대승과 이황 사이에 있었던 훈훈한 논쟁이 아니었고 쌍욕을 하지 않고 주먹만 들지 않았지 사제간에 붓으로 서신을 오고가며 피터지게 싸운 논쟁입니다. 논쟁의 원인은 아버지 윤선거가 예송논쟁으로 사이가 멀어진 윤휴와 송시열을 화해시키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송시열이 이를 계기로 윤선거를 미워하게 되었고 이후 송시열은 윤증에게 윤선거의 묘지명을 써달라고 부탁받자 그의 행적을 비판하는 묘지명을 적었습니다. 통상 묘지명에는 좋은 말만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송시열의 이런 행동에 윤증은 크게 분노하게 됩니다. 이것이 논쟁의 시발점이 되고 회니시비로 발전되게 되었죠.

 

 

회니시비를 계기로 서인은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윤증을 따르는 소론으로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윤증은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대 학자인 만큼 그를 따르는 문인들이 많았고 이 거물급 인사의 초상이 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런데 윤증의 초상은 한 번 그려진 뒤 후대 화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모사되었고 지금도 여러점 남아 있습니다. 그 중 5점의 윤증의 초상과 1점의 전적이 윤증초상일괄이란 이름으로 보물 149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윤증 초상은 역사적이든 예술적이든 이야기거리가 많지만 이번 글에선 연호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연호는 군주가 자기 치세연차에 붙이는 칭호입니다. 오늘날에는 예수 탄생을 기준으로 서기나 단군이 건국 했을 시점으로 하는 단기를 써서 시기를 나타냈는데 과거 우리나라에선 주로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여 시기를 나타냈습니다.

 

 

윤증 초상 중 측면전신좌상에도 연호가 적혀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숭정기원후재갑자사월모(崇禎紀元後再甲子四月摹)라 묵필로 적혀져 있는데 초상이 그려진 시기를 알려줍니다. 여기서 숭정기원후재갑자가 몇 년을 나타내는 것이 핵심인데 명 의종의 연호가 1628년 무진부터 시작되니 숭정원년 이후 두 번째 갑자년이므로 1744년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의종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당하기 직전 목을 매어 세상을 떠난 년도가 1644년 이므로 숭정황제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나서도 숭정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윤증 초상 일괄의 초상 중 1점은 장경주가 2점은 이명주가 그렸다. 나머지 초상은 누가 그렸는지 미상이다. (출처 : 두산백과)

 

잘 알다시피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에 입성한 후 명은 멸망했습니다. 그 후 이자성은 청군에 쫓겨 진압되었고 강남에는 청군에 맞선 남명 정권이 들어서긴 했지만 모두 진압되었습니다. 즉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선 이후에도 조선은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후국은 천자국의 연호를 따릅니다.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청에 굴복하고 청에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 되었기에 공식석상에선 천자국인 청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윤증 초상에 숭정 연호를 사용한 건 무슨 의미일까요?

 

 

중국 왕조는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라고 하고 주변 국가를 라고 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천자국으로 높이고 주변 국가를 오랑캐라 하여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왕조는 이러한 華夷관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당연히 오랑캐가 중국 왕조와 관계를 맺을 때는 반드시 조공-책봉관계로 맺었습니다. 조공은 주변 국가가 사신을 보내 중국 왕조를 다스리던 천자에게 인사드리고 주변 국가에서 나는 토산물을 바치는 행위며 책봉은 천자가 주변 국가의 왕에게 작위를 하사하고 그 땅을 내려주는 행위입니다. 조공-책봉관계가 맺어지면 중국 왕조는 주변국에게 하사품을 내리고 주변 국가는 복종의 의미로 중국 왕조가 하사한 달력과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러한 외교관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긴다 하여 섬길 에 클 자를 써 사대관계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실제 천자국이 주변국가를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한적은 많지 않습니다. 그보다 사대관계는 형식적인 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형식적인 조공-책봉관계는 한반도 국가들도 받아들여 우리 역사에선 매우 익숙한 일이었고 중국의 연호 사용은 낯선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조선도 조공-책봉 질서 속에서 명에 사대를 하였습니다. 문제는 조선 초기 까지만 해도 명에 진심으로 사대를 했다기 보다 어쩔 수 없이 복속했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중국 왕조는 힘이 강했고 조선은 약했기 때문에 국가 안보상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지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은 고려시대 사대관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형세를 살펴서 사대를 한다 하여 형세적 사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 중기가 되자 성리학의 가르침에 철저한 사림세력들이 향촌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향촌질서를 성리학 중심으로 바로 잡은 후 정치적으로도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외교정책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성리학은 남송에서 나온 새로운 유학으로 화이관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림들은 당연히 화이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했고 조선은 중국 왕조가 강해서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학을 낳은 중화문명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대관을 명분론적 사대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을 겪자 명이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게 되고 실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조선 사대부들은 명이 조선에게 베푼 은혜를 再造之恩이라 하여 명분론적 사대의식을 극대화 됩니다. 선조를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임진왜란의 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선 관군이나 의병의 활약상을 낮추고 명에 대한 은혜를 강조하여 이러한 의식을 키우는데 일조합니다.

 

 

그런데 선조 말엽부터 여진족의 힘이 강해지고 후금이란 나라까지 세우자 이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직후 여진족을 군사적으로 방비할 힘이 조선에겐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 명에 무조건 적인 사대의 예를 표방하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후대 학자들이 부르는 소위 중립외교란 것을 하며 전쟁을 막아보려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명에 대한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를 섬기는 행위로 인식되었습니다. 성리학 이념을 국가 정책에 실현하고자 하는 성리학자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광해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파행적인 궁궐공사와 수 많은 옥사를 일으켰고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유폐 같은 폐륜적인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하게 됩니다. 그런데 새롭게 정권을 잡은 인조 정권은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을 위해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명이 조선에게 베푼 은혜를 더욱 더 강조하며 지성사대를 외치게 됩니다. 즉 명분론적 사대관이 더 강해지고 있었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조선 사대부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죠.

 

 

그러나 조선의 사대관과는 별개로 현실에선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고 청으로 국명을 바꾼 여진족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되자 꼼짝없이 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청에 사대의 예를 표방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청의 연호를 사용해야만 했죠.

 

 

그런데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라 청이 아니라 명을 섬겨야 합니다. 명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화문명의 적법한 계승자라 섬겨야 하는 데다 조선을 도와줬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은혜를 갚아야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명은 멸망했고 조선은 명의 복수를 위해 청을 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명을 위해 청에 대한 복수 하자는 북벌론이 조선 정국에 나돌기 시작했고 실제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효종이나 숙종 대 남인정권이 실행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라는 것을 조선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에 의해 끊겨버린 중화문명을 조선이 간직하고 보존하여 언젠가 복수하자는 정신승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주에서 시작된 중화문명을 이제는 중국이 아니라 조선에서 받들자는 것입니다. 이 중화문명의 핵심은 바로 성리학이며 성리학이 발달한 조선이야 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존주론입니다. 주는 천명을 받아 은을 치고 주도권을 잡은 중국의 왕조로 공자가 동경했다는 문화와 존경했다는 주공이란 인물 모두 이 나라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존주론은 주로부터 시작된 유학을 조선이 계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와 함께 중국에는 끊긴 중화문명이 조선에서 이어나간다는 자부심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이 곧 중화다라고 생각하는 조선중화주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숭정 이후 명의 명맥이 끊겼냐?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명정권이 청에 항거하고 있었고 남명정권도 저마다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선 남명정권의 연호를 사용하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명정권보다 청이 명의 계승자라는 인식마저 갖고 있었죠.

 

 

이것은 당대 조선 사람들은 중화문명의 계승자는 남명이나 청이 아니라 조선이라 여겨 청이나 남명의 연호를 사용할 수도 사용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은 현실적으로나 성리학적 명문으로나 천자국이 될 수도 없습니다.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을 기리는 것이 성리학적으로 맞는 행동이었습니다. 조선 정부에선 어쩔 수 없이 청과의 외교 분쟁을 막기 위해 청의 연호를 사용할 수밖엔 없었지만 일반 사대부들이 사적으로 숭정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 연호를 사용이 일반화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창덕궁에 대보단을 설치하여 명 의종을 기린다던지 만동묘에 명 의종의 글자체로 非禮不動이란 글귀를 암벽에 새긴다던지 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남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숭정이라는 연호를 사적에서 계속해서 사용한 것이죠. 앞서 언급한 윤증 초상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문과의 소과에 해당하는 사마시(진사시)의 합격자 명단인 사마방목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숭정연호로 표기된 방목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불교계도 숭정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숙종 시기 만들어진 현재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개운사 숭정기원후팔십년명 범종도 숭정연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왕실에서도 숭정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영조 재위시기에 세워진 사천의 세종의 태실지의 표석에도 숭정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문집에서 숭정연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개항기까지 이어집니다. 유림들이 많이 참가한 을미의병 때도 의병장들의 격문에 숭정연호가 많이 나타납니다.

 

 

조선이 숭정이란 연호를 계속해서 사용했던 것은 단순히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는 생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닌거 같습니다. 물론 조선이 진심으로 망한 명을 그리워하고 섬기려고 한 정서는 분명히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보다는 숭정이라는 연호를 쓰는 것 자체가 중화문명을 지키는 것이고 중화문명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조선이란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 생각하며 서양에서 만들어진 민주주의를 연구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것과 말입니다.

 

by 동두철액 | 2019/09/13 17:34 | 조선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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